기말고사 마지막 날에 의주는 시험을 치르는 대신 누나와 함께 국현미로 전시회를 보러 갔다. 누나가 꼭 그 날, 의주와 함께가 아니라면 안 된다고 우겼고 그녀가 그런 고집을 부리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주는 마지막 시험에 철저히 대비하지 못한 상태이기도 했다. 1교시 강의 한 개 때문에 금공강 사수에 실패한 그는 금요일 아침이면 번번이 자체공강의 유혹에 시달렸고 그중 과반수에 굴복했다. 그러니 출결점수는 못 받는다고 봐도 무방했고 강의의 절반을 안 들었으니 중간고사를 잘 봤을 리 없었으며 기말에 만회하겠다는 다짐은 시험 범위인 강의 자료를 열어본 순간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의주는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깨끗하게 F 받고 재수강하지 뭐 이런 생각. 목요일 저녁에 누나의 연락을 받은 그는 같은 날 종강한 동기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다음날 해가 중천일 무렵에 간신히 일어나 라면으로 해장한 뒤 누나를 만나러 갔다. 전시회는 리얼리즘에서 추상주의로 이행한 러시아계 화가의 회화 작품을 다루었는데 의주가 이해하기는 조금 어려운 부류인가. 누나는 오디오가이드가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의주에게 팔짱을 낀 채 전시회를 관람하며 간간히 그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의주는 그림과 누나 사이를 가로막은 사람들이 전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번씩 셔터를 눌렀다.
관람을 마친 둘은 경복궁 터를 에워싼 돌담길을 따라 소격동에서 삼청동까지 걸었다. 누나는 여전히 의주에게 꼭 붙어선 채였다. 그러다 문득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의주가 내 남자친구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의주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애인과 헤어졌음을 알아차렸다. 술집에서 그녀는 결혼에 있어 사랑보다 중요한 가치를 믿는 것처럼 구는 남자들에 대한 불평을 한동안 늘어놓았고, 연인에게 내어줄 것이 없는 사람을 자격미달 취급하는 세태를 논리정연하지 못하게 비난했다. 의주는 신혼집을 구할 능력이 없다면 프로포즈를 주저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구태여 말로 하지 않았다. 대신 누나가 너무 잘나서 그렇잖아, 하고 입에 발린 소리를 주워섬겼고 그녀는 실소를 흘렸다.
잘난 내가 못난 자기라도 사랑해 주겠다잖아. 근데 뭐가 문제냐고.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다. 뭐가 문제래.
여유가 없는 건 알겠어. 그런데 우리집은 아니잖아. 우리집에서 도와주는 건 또 싫대. 그 정도 자존심도 못 굽힐 정도로 나에 대한 사랑이 작다는 게 나는 속상한 거야.
누나와 누나의 남자친구는 의주보다 네 살 많았다. 결혼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아주 자유로운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결혼을 서두를 군번도 아니었다. 누나가 손쉽게 폄하하는 남자친구의 사랑보다 그녀의 사랑이 크다면, 그가 불안함을 느끼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 주면 되는 노릇이 아닌가? 그럼 누나는 사랑의 결실이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의주는 떠오르는 말이 많았지만 전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런 상태의 누나에겐 생각나는 곧이곧대로 떠드는 것보다 그저 들어주는 것이 능사임을 여태 그녀와 지내온 시간으로 알고 있는 의주였다. 물론 의주의 관습적인 미봉책이 그녀에게또한 낯선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한두 번 의주를 노려보며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다그쳤지만 곧 제 풀에 지쳐 입을 다물었다. 술집을 벗어났을 때 그녀는 몸을 가누지 못하도록 취해 있었고 의주는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나아가는 그녀를 뒤에서 주시하며 그녀가 탈 택시를 호출했다.
혼자 갈 수 있어?
응. 괜찮아. 너도 빨리 택시 불러.
진짜 같이 안 타도 돼?
아, 가 그냥.
간다.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의주는 자신이 누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말이 아닌 조금 고심해서 할 수 있는 위로. 제언. 조언? 그는 스스로를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누나의 일에 있어서만은 그녀를 모르거나 조금만 아는 사람들보다 그럴 듯한 쓸모의 말을 건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와 뜻이 맞는 사람이 언젠가 나타날 거라는 말은 지나치게 고루했고, 결혼에 대한 확신이 사랑의 크기를 증명하지는 않는다는 말은 언뜻 설교 같았다. 의주는 결혼에 대하여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일이 없었으므로 설득력도 부족했다. 평생 결혼 못하면 같이 살자고 말했다면 그녀는 웃었을까? 무엇이 정답이었는지는 영영 알 길이 없다. 그 날을 마지막으로 누나와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시가 반파된 지 일주일. 칩거하던 의주는 비로소 집을 나서기로 마음 먹었다. 먹을 게 떨어진 탓이었다. 요리를 등한시하며 레토르트 식품으로 연명하던 지난날을 저주한다. 그래도 굶어 죽는 것보다야 살아 남으려는 시늉은 해보고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거리로 나가면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필요를 다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물론 그러기 위해 어떻게 하겠다는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의주는 어딜 가든 키만 멀대 같이 크다는 소리나 들었고 딴에 몸을 키우겠다고 운동에 매진했던 시절이 있었으나 마른 나뭇가지 같은 팔뚝에 생존근육 비슷한 게 붙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몸빵은 선택지에 없었고 의주는 면허 소지자도 아니었으며 그가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류라고 해도 좋을 사브르는 중학교를 졸업하며 펜싱부 후배에게 물려준 지 오래였다.
기껏 생각해서 의주는 옷장 속에 잠자고 있던 야구 배트를 꺼냈다. 폭이 깊은 백팩에 배트를 찔러 넣고 거울 앞에서 등 뒤로 손을 뻗어 재빨리 배트를 꺼내는 동작을 연습했다. 하지만 꺼내는 것과 휘두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고 의주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마치기도 전에 진이 빠졌다. 백팩을 맨 채로 바닥에 드러눕자 시야 가득 천진난만한 낯빛의 천장이 들어찼다. 그는 이미 통신의 기능을 상실했으나 습관처럼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서비스 없음’이라는 글씨 밑을 밝힌 화면 속에 당연하게도 새 알림은 없었다.
고립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순간에도 이렇게까지 혼자인 기분은 아니었는데.
사람이 사람을 무는 이상 현상에 대한 속보가 올라왔던 날에 의주는 집에 있었다. 방학 첫 날의 의례로 아침에 깨고도 다시 잠을 청했고 열 시 쯤에 눈을 떴지만 한 시간 더 누워 있었다. 이불 속에 파묻힌 채 하염없이 릴스를 보다가 또 깜박 잠이 들었나. 일어났을 땐 점심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고 혼곤한 정신으로 배달 앱에서 규동을 주문했는데 취소당했다. 심심한 언짢음을 눌러 담고 주방으로 기어 들어가 라면을 끓이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냐는 물음이었다. 새삼스러워서 의주는 픽 웃었다. 나 집이지. 젓가락으로 면발을 뒤적이고 있으니 엄마가 또 말했다. 절대 나가지 말고. 누나랑 연락 되니?
나 어제도 봤는데.
어제 말고 오늘. 통화했어?
아니?
그러자 엄마가 울먹거렸다. 의주는 당황해서 젓가락을 내려놓고 어깨와 관자놀이 사이에 끼워 두었던 핸드폰을 바로 들었다. 왜 그래? 의주야, 뉴스 안 봤어? 나 티비 없잖아. 의주야… 소식 못 들었어? 나 방금까지 잤어. 무슨 소식.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났다는 예감은 살면서 보았던 무수한 범죄 사건들에 대한 파편적인 기억들과 함께 왔다. 누나한테 무슨 일 생겼어? 물음에 엄마는 호흡을 고르기 위해 노력하는 듯 하다가 겨우 답했다.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연락이 안 돼서. 연락되면 엄마한테도 알려줘. 알았지? 절대 밖에 나가지 말고 뉴스 계속 보고.
통화가 끝났을 땐 라면이 다 익어 있었다. 의주는 불을 끄고 조리대에 기대어 카톡에 들어갔다. 나태하게 흘려보낸 반나절 동안 평소보다 누적된 알림들 가운데 누나가 보낸 메시지도 있었다. 지금 와줄 수 있냐는 물음과 지도 앱에서 찍어낸 위치. 그로부터 이십 분 간격을 두고 보내진 마지막 메시지는 오전이 끝나기 직전 쯤의 시간에 도착해 있었고. 괜찮아, 승현이가 와준대. 거기까지 읽은 즉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누나는 받지 않았다. 언급된 이름의 주인이 언젠가 연락처를 교환했던 그녀의 전 남자친구임을 인식하고 그에게도 연락을 시도했으나 마찬가지였다.
어디야?
누나의 이름 아래로 물음을 던진 의주는 지도에 두 시간 전 공유되었던 그녀의 위치를 옮겼다. 그녀가 사는 집 근처의 카페였고 가는 데까지 택시로 사십 분 남짓이 걸렸다. 패딩에 모자를 집어 쓰고 지갑을 챙긴 뒤 운동화를 구겨 신으며 택시 앱을 열었는데 호출이 폭주하여 한시적으로 서비스를 제한한다는 팝업이 떴다. 그제야 의주는 미세한 위화감을 느꼈다. 포털에서 뉴스 탭을 찾았다. 속보와 후속 기사로 점철된 화면을 들여다 보다 현관에 앉아 밀린 카톡 메시지와 디엠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나가지 않기로 했다. 누나가 걱정되었지만 엄마에게 괜한 불안감을 더해주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는 상태로 소파에 앉아 시간을 견디고 있으니 외부의 소음이 정적을 비집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부딪치는 소리와 부서지는 소리 같은 게 들렸고 충격을 감지한 자동차의 경보음이 뒤따랐다. 의주는 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 비명 소리가 들려서 결국 창가로 다가섰는데 후회했다. 사람이 죽는 모습 같은 건 영화에서도 보기 싫었다. 의주는 피 튀기는 스릴러도 무차별적인 대량 살상이 일어나는 액션 블록버스터도 즐기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엔 맥락과 서사가 있고 장면은 의미를 내포하기 마련이지만 어떤 주제를 설파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장치라는 건 없다고 믿었다. 그러니 폭력을 차용하는 건 창작자의 고집이고 그건 얼마든지 다른 장면으로 대체 가능하다고.
그러나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없는 것이야말로 현실의 본질일 테다. 의주는 생살이 찢겨 쓰러진 사람이 의식을 잃고 눈을 감았다가 곧 다시 일어나 자신을 공격했던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을 찢어발기는 모습을 지켜보다 창가에서 눈을 뗐다. 소파에 구겨져 누나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하는 동안 전화가 두세 번 더 울렸고, 속보가 이어졌고 공항이 폐쇄되었다. 기차의 운행도 중단되었고 지하철이 속속들이 마비되었다. 주요 시설을 사수하기 위해 특공대가 투입되었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늦은 밤 수도권을 통과한 전염병,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전염병이 산맥을 넘었고, 지역별 정전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부터는 방송국도 확보된 대피소에 대한 보도를 중단했고, 그날 밤을 기점으로는 모든 보도를 멈췄다. 전화가 됐다가, 안 됐다가, 됐다가 하다가 끊겼다. 그 다음 날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그런데 어떤 원리인지 그 다음 날에는 또 불이 켜졌고, 그런 상태가 사흘 간 지속되어서 의주는 온 집안을 뒤져 전자 기기와 보조 배터리 따위를 충전했다. 세탁기도 돌렸다!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무엇이든 전부 해봤다. 그리고 자신이 참 모자라고 무력한 존재임을 실감했다.
그래도 그 덕에 의주는 지금 뽀송한 옷을 입고 있다. 포근한 섬유 유연제 향이 밴 후드 티와 청바지에 올 겨울 새로 산 패딩을 걸쳐 머리부터 발끝까지 향긋하다. 혹시 물릴 일에 대비해 팔뚝에 박스 테이프를 감아 둔 탓에 움직이기 마냥 편하지는 않지만. 백팩에는 500ml 생수와 야구 배트, 보조 배터리와 십자 드라이버가 담겨 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을 노릴 계획이었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길로 빠르게 다녀오기 위해 머릿속으로 경로를 거듭 복기한 뒤 의주는 문을 열었다. 5층 건물의 4층 복도에 피습의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계단을 타고 두 층 정도 내려가자 벽과 핸드레일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의주는 걸음을 서둘렀다. 지난 일주일이 도처의 생물체를 모조리 성공적으로 쓸어낸 듯 보도블럭을 밟을 때까지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때 움직였으나 지금은 움직이지 못하는 것들의 잔해를.
인터넷이 끊기기 직전까지 스스로가 관찰하여 알아낸 바를 기록한 한 유튜버의 영상에 의하면 변이는 일정한 단계를 거쳐 진행된다고 했다. 감염의 조건은 감염자에게 물리거나 그들의 체액에 노출되는 것. 물리는 과정에서 감염자의 타액이 체내에 스며들 테니 사실상 유일한 조건일 것이다. 피부에 가시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의식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 하루 쯤 지나면 상처 부위에서부터 타는 듯한 고통이 시작되고, 그로 인해 서서히 체온이 오르고, 마침내 후두부까지 올라온 열기에 시야가 흐려진다. 의식을 잃는 데에는 약 72시간이 소요된다. 그는 동행하던 친구가 무의식 상태에서 다시 깨어나는 장면까지 영상에 담았다. 빈사에 이른 자를 인적이 없는 주차장 기둥에 묶고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다시 일어난 사람의 눈은 홍채까지 하얗게 바래 흰자위와 검은자위가 구분되지 않았고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으며 아는 사람을 알아보기는커녕 지성이 없는 동물과 같은 상태로 전락해 묶인 채로도 사지를 허우적거리고 이를 딱딱거리며 눈앞의 상대가 누구든 공격하고자 하는 양상을 보였다. 움직임은 다른 부위가 아닌 머리에 관통상을 입혀야만 정지했다. 그를 처리하는 장면만은 잘라내고 자막으로 대신한 영상은 치명상을 입었거나 즉사한 경우의 변이 속도는 다를 수 있다는 부연으로 끝났다. 그건 길바닥에 머리만 심각하게 손상된 종류의 시체가 널려 있는 이유일 테다. 의주는 쳐다보지 않도록 노력하며 나아갔다. 목적했던 편의점에 다다랐다. 하지만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입구에 자전거 자물쇠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가게 안에 갇힌 감염자들이 의주를 인식하고 유리 문을 흔들어댔다. 소음이 발생했고 의주는 주춤거리다 돌아섰다. 소리를 듣고 다가오는 기척이 불특정한 사방에서 느껴졌다.
열린 문을 발견하고 뛰어 들어온 마트 안은 고요했다. 코너와 코너 사이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던 의주는 내부에 드리운 정적을 확인하고 정신을 다잡았다. 선반을 살피고 있으니 율무차 믹스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백팩을 앞으로 돌려 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좀 더 걸어 통조림 대여섯 개와 부피가 크지 않은 과자 몇 종류를 챙겼다. 맞은편 코너 뒤에서 부패가 진행된 감염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낸 건 음료수 가판대 앞에서 가방의 여백을 가늠할 때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성치 않은 걸음걸이로 가까워지는 감염자는 느렸지만 의주 외에 다른 목표물이 없어 보였다. 그는 무심코 숨을 들이켰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누군가 등 뒤에서 의주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고 의주는 놀랄 틈도 없이 그에게 이끌렸다. 의주의 입을 막지 않은 다른 손이 의주의 한쪽 손을 감쌌고 그 손이 따뜻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의 그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손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친 끝에 사위가 어두워졌다. 창고인 것 같았다. 곧 저를 떠나간 손이 창고의 문을 닫았다. 암흑 속에선 돌아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불현듯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플래시라이트가 쏟아졌고 의주는 비로소 손전등 반대편에 선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니콜라스.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강의실을 오며 가며 봤을 뿐. 출석 부를 때 들은 이름을 외웠을 뿐. 흔치 않은 외국인의 이름이니까. 그리고 은연 중에 서양인의 얼굴을 떠올렸었나. 우연한 계기로 얼굴을 알게 되고 ‘쟤가 니콜라스?’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내 이름 알긴 하려나, 생각했는데. 의주, 하고 이름을 불렸다.
왜 혼자 다녀? 위험하게.
…너도 혼자잖아.
난 혼자 아니야.
니콜라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의주는 부연을 바랐지만 그가 말을 더하고 싶은 기색을 보이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친분이 없었으므로 그와 가까운 사람들의 안부를 물을 수도 없었고 스스로에 대해 말하고자 하니 말하고 싶은 것이 없었으므로 그냥… 나는 혼자야. 그러자 니콜라스는 조금 안쓰러운 얼굴을 했는데 그도 딱히 건넬 말이 생각나지는 않는 듯 했다. 그러다 문득, 그럼 같이 기다릴래? 물어오기에 누구를… 하고 되물으려는 찰나 창고 문이 열리고 바짝 긴장한 표정의 여자 하나와 그녀의 허리께 쯤 오는,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남자아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중에 듣기론 니콜라스의 대학교 친구와 그녀의 동생이었다. 너는 알았는데 친구분은 학교에서 본 적이 없네. 그러자 니콜라스는 웃었었다. 기억해줘서 고맙네,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얜 뭐야?
의주. 내가 찾았어.
니 친구야? 여기 어디서 만난 거야?
응. 데려가자. 혼자래.
괜찮은 거 맞아? 얼빵해 보이는데.
괜찮아. 같이 갈 거지?
의주와 이름이 닮은. 주은은 피칠갑이 된 소매와 가슴팍을 차치하고도 몰골이 여간 엉망이 아니었는데 자신만 그런 행색인 게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녀는 헤어지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상태의 니콜라스와 뽀송하기 그지없는 의주를 아래위로 훑어 보다 니들이 앞장 서, 쏘아뱉곤 비슷하게 누덕누덕해진 동생의 옷매무새를 고쳤다. 대답하지 않았는데, 같이 가는 건가? 의주는 가방을 집어 들고 문이 열린 틈새로 니콜라스를 좇아 나아가면서도 생각했다. 집엔 아직 전원이 닳지 않은 보조 배터리와, 입지 않은 새 옷들과, 읽지 않은 새 책들, 발견했으나 고쳐 볼 시도조차 하지 못한 오래 전의 블루투스 스피커, 소리에 반응하는 비이성체들이 득시글한 도시에서 한번이나 맘놓고 틀어 볼 수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그런 것들이 한가득인데 전부 뒤로 하고 따라가도 되나? 남기고 오는 건 그것뿐이 아닐 텐데. 어쩌면 다시 돌아갈 수 없을 텐데. 의주는 이전의 삶이 어땠는지를 잊지 않게 하는 공간이 주는 실낱 같은 안온감과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아직 사는 새로운 삶의 생동감 사이에서 갈등했다. 니콜라스는 내 이름을 왜 알고 있을까? 고개를 들었다.
간다면, 어디로?
[모쿠포]. 발음이 귀엽고 일본어 같아. 일본어가 다 귀엽다는 뜻은 아니지만. 제주도로 가는 배가 있는 도시 중에 발음이 제일 귀여워서 거기로 정한 거야. 니콜라스의 설명에 주은이 고개를 저으며 정정했다. 서울에서 차로 갈 때 목포항이 제일 가까워서 그런 거야. 집에 라디오가 있었는데, 라디오는 아직 방송이 나오거든. 거기서 제주도 공항에서 생존자를 타국으로 이송시키고 있으니 배편으로 제주도로 가라고 그러더라고. 그러고 항로가 개설된 항구 몇 군데를 불러 줬는데, 찾아보니까 거기가 제일 가까웠어.
제주도에 우리 부모님도 계신데.
잘 됐네. 가서 인사하고 같이 중국으로 나르자.
중국으로 간대?
모르지 그건.
근데 그럼 사람이 몰릴 텐데 안전할까?
그걸 미리 생각해야 할까? 니콜라스야, 얘 좀 이상한 것 같애.
턱을 괸 채 주은의 말을 경청하던 니콜라스가 손바닥을 내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버릇인가 보다. 의주가 생각했다. 잘 모르니까 일단 가보는 거야.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 말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다음 날 출발하기로 했다. 준비는 의주가 합류하기 전에 이미 끝났다면서 말이다. 라디오에서 소식을 들은 건 이틀 전. 어제 온동네를 뒤져 시동이 걸리는 큰 차를 찾아 주유를 마치고 집 앞에 두었고 한 열흘은 족히 먹을 식수와 음식도 채워 넣었고. 약국도 털었고 옷과 담요도 뭐 얼마나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공간이 허락하는 만큼 쓸어 담았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어쩌면 필수는 아니지만 있으면 좋을 것 같은 것. 그런 걸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밖으로 나왔고 식량을 보충하러 늘 가던 마트, 그 안의 창고에서 한 시간 뒤에 만나기로 하고 찢어졌는데 그 사이에 의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도래한 다음 날 운전석에 앉은 건 니콜라스였다. 의주는 뒷좌석을 자신의 자리로 짐작했지만 시은이 주은의 꽁무니를 쥐고 놔주지 않아 조수석에 올랐다. 감염자들에겐 밤낮이 없지만 생존자들은 잠을 자기 마련이므로 이른 아침이었다. 사람들을 피해야 할 이유가 있어? 물음에 니콜라스는 너는 좀비 영화도 안 봤냐? 하며 피식 웃었다. 원래 사람이 더 무서운 거야. 좀비는 막 떼거지로 있는 거만 조심하면 괜찮아. 그가 백미러 각도를 조정하며 중얼거렸다. 영화랑 같나. 의주는 받아치는 대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 주는 안정감 속에서 비로소 바로 본 거리가 절망해야 할 정도로 죽어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새벽녘의 주택가는 으레 한적했다. 다만 높지 않은 단일 건물들이 즐비한 골목길을 벗어나 시내에 진입하자 표적 없이 서성거리는 감염자들이 하나 둘 눈에 띄었고 간혹 차체에 닿아오는 시선 중에는 산 사람들의 그것도 있는 듯 했다.
니콜라스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차를 몰았다. 찻길의 시체는 밟지 않고 피했고 무너진 건물의 잔해 따위로 막힌 길 앞에서는 차분하게 경로를 바꿨다. 감염자에게도 산 사람들에게도 눈길을 뺏기지 않았고 간간히 핸드폰으로 켜놓은 지도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이따금 의주를 돌아봤는데 말은 전혀 걸지 않았다. 의주는 어릴 적 학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빠나 엄마가 의주가 잠에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조수석을 돌아보고 안 자네, 하며 가볍게 웃곤 하던 것을 떠올렸다. 나 안 자, 그러자 과연 니콜라스는 눈을 정면에 고정한 채로 피식 웃었다. 그렇게 크게 웃은 게 아닌 것 같은데 죽 잡아당긴 것처럼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인상적인 미소였다. 니콜라스는 턱이 굉장히 뾰족한 편이기도 했다. 좁다고 해야 하나 작다고 해야 하나, 남자들은 보통 턱 끝에서 귀 밑으로 이어지는 선이 각져 있는데 그는 그 부분이 거의 없다 싶은 수준으로 완만했다. 말하자면 그를 여타 사람들과 구별시키는 건 그런 미묘한 차이들인 것 같았다.
내 얼굴 뚫리겠다.
아… 알았어?
다 보여.
어떻게 봤지. 방해될까 봐 일부러 말도 안 하고 있었는데.
방해 안 돼.
운전한지 오래됐나 보다. 잘하네.
나 면허 없어.
도로 한복판에 서 있던 감염자 한 마리가 창틀에 몸을 붙여 왔다. 니콜라스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유유히 주행을 계속했다. 의주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을 알아채고 작게 웃었다. 의주 면허 있어? 없어. 근데 의주도 할 수 있어. 그냥 앞에 보고 가면 돼. 사람도 별로 없고 차도 별로 없어서 쉬워. 와…. 뭐가 ‘와’야?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
성실하구나, 의주.
이런 걸 성실하다고 하나?
그냥 내가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상상하면서 하면 되는데.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감염자들만 아니라면 여행을 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평화로운 엑소더스. 슬쩍 돌아 본 남매는 잠들어 있었고 어느새 고속도로 진입을 앞둔 긴 터널 속이었다. 의주는 그를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되짚어 보면 이번 학기만 해도 그와 함께 들었던 강의가 한 개보단 많았고 그는 정들었다 싶을 쯤 떠나가는 교환학생 신분도 아니었다. 의주에겐 그의 존재를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인식했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원체 사람이 많은 학과였고 의주는 평생 인간관계를 넓히는 데 흥미가 없었다. 초등학교 때에도 중학교 때에도 고등학교 때에도, 학년이 올라가면 같은 반에서 온 애들부터 찾았고 그 정도만 해도 인간으로서의 희노애락을 향유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의주와 가까워지는 사람들이란 대개 그와 비슷한 부류였던 탓에 생활은 안정적이었던 동시에 단조로웠기 때문에. 니콜라스를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양상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갑자기 나한테 목숨을 맡기는 게 불안해졌어?
…조금?
옛날에 본 어떤 드라마에서, 잘은 기억이 안 나는데. 되게 무서운 상황이야. 차가 꼭 있어야 돼. 그 때 어떤 여자애가 옆에 있던 차에 이렇게 타서 핸들을 잡아. 따라 온 친구가 너 운전하는 법 알아? 그러니까 그 여자애가 몰라, 그런데 삼촌이 하는 거 옆에서 본 적 있어, 이래. 그리고 가기 시작해.
응.
그거랑 똑같아.
의주가 헛헛한 웃음을 뱉었다. 어디서 본 건 참 많은가 보다. 말은 하지 않았다. 시원찮은 의주의 반응에 니콜라스는 대만에서 아버지 차를 운전해 본 적도 있고 어제, 갓길에서 이 차를 몰고 주유소에 들렀다가 다시 집 앞으로 끌고 온 것도 저라는 말을 보탰다. 바이크의 면허는 제대로 있다는 말도. 대만에서는 필수거든. 나중에 놀러 오면 그 때는 바이크를 태워 주겠다고도 했다. 단순히 둘러대는 듯한 어조는 아니었다. 의주는 그가 믿는 것을 저도 믿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터널이 끝났다. 고속도로가 나타났다.
근데 왜 혼자였어?
아. 나 혼자 살아서.
그게 아니라. 계속 혼자 있었어?
어어. 밖에 안 나갔거든. 너네 만난 날 처음 나간 거야.
왜?
사방이 탁 트인 도로 위에서 니콜라스는 어느 정도 속도를 올렸고, 한번씩 문이 열린 채로 버려진 차가 그들을 스쳤다. 그런 차들을 몇 대쯤 더 지나치자 드문드문 바닥을 물들인 혈흔이 눈에 띄었다. 달리다 넘어진 듯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쓰러진 시체들도 종종 보였고 그는 승용차 서너 대가 겹겹이 충돌하여 주로가 좁아지는 구간에서 다시 속도를 줄였다. 왜냐니… 질문의 근간을 가늠하던 의주는 형편없이 찌그러진 차체 안쪽에서 움직임을 포착하고 무심코 숨을 죽였다. 동시에 반쯤 뜯겨나간 차량의 문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는 저도 모르게 니콜라스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움찔거린 니콜라스의 시선이 의주를 향했다. 그는 짐짓 주눅든 것처럼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
…아니야. 저기 사람이 있어서….
죽은 사람이야.
정적이 한동안 이어졌다.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누나에 대해 말해야 할지 갈등했다. 그러다 결국 방향을 틀어 학교에서의 일을 꺼냈다. 강의실에서 너 본 적 있어. 그러자 니콜라스의 입매에 작게나마 미소가 돌아왔다. 나도. 나도 의주 본 적 있어. 우리 같은 수업 들었잖아. 의주 맨날 앞에 앉았잖아. 그는 목이 뻐근한지 고개를 빠듯하게 옆으로 기울였다 이어갔다. 나는 의주가 조는 것도 봤어. 의주가 머쓱하게 뺨을 쓸었다. 집중하면 졸리더라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안 졸려고 집중을 안 했어. 의주의 말에 니콜라스가 운전대를 두드리며 대소했다. 그게 뭔데 대체! 음성이 커지자 뒷좌석이 부스럭거렸다.
나는 니가 출석 부를 때 하이! 이랬다가 네, 이러는 거 들은 적 있어. 그래서 처음엔 일본 사람인 줄 알았어.
그 때 너도 웃었구나?
아니 나는 웃진 않았어.
하, 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계획에 없었던 정차로부터 방치된 차들이 좀 더 보였고 그 즈음해서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의 수도 늘어났다. 니콜라스는 그때마다 방향을 틀었지만 이따금 뻗어나온 팔 따위에 걸려 조그만 턱을 넘을 때처럼 차체가 덜컹거렸다. 그러면 그는 눈을 굳게 감았다 뜨거나 한숨을 쉬었고 그때는 의주가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뭔가 실없는 말을 건네도 웃지 않았다. 잦아진 침묵의 빈도가 부채감으로 다가올 무렵 시은이 잠에서 깼다. 니콜라스가 입꼬리를 힘겹게 끌어올리며 백미러 속의 남자아이에게 물었다.
시은이 잘 잤어?
뒷좌석에서 소심한 문안인사가 돌아왔다. 니콜라스가 가볍게 키들거렸다. 시은이가 누나도 깨울래? 아이를 대할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 같았는데 음성이 아닌 음도에 있어서의 차이였다. 그는 주은이 잠긴 목소리로 나 깼어, 내뱉기 무섭게 본래의 낮고 느슨한 소리를 되찾았다.
어디까지 왔어?
일단 서울은 지났고.
아직 그거밖에 못 갔어?
주은, 더 잘래? 기절시켜 줄까?
니콜라스, 잠깐만.
의주가 니콜라스를 부른 건 그가 드물게 뒷좌석을 향해 고개를 꺾은 사이 전방에 나타난 빈 차, 그 열린 문에서 자동차 소음을 듣고 무의식 상태를 벗어난 감염자들이 기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대로 지나가도 그들을 치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혹여나 그렇게 된다면 니콜라스의 기분이 상할 것이 신경쓰였다. 하지만 그가 좀처럼 자세를 바로 하지 않아 언뜻 불안한 마음이 생겼고 그를 대신해 앞을 주시하고 있으니 저 멀리 주로가 보이지 않도록 빽빽하게 정차된 차의 군집이 눈에 들어왔다. 한편 차 뒤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니콜라스의 표정을 먼저 읽은 건 주은이었다. 야, 앞에 봐. 왜 그래? 질문을 떨어뜨림과 동시에 정면의 상황을 알아차린 그녀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니콜라스!
충돌은 의주가 핸들을 쥔 니콜라스와 손을 겹치는 순간에 일어났다. 두 번째 호명에 마침내 앞을 돌아본 그가 어떤 수를 쓸 수 있기 전에 육중한 충격이 차체에 전가되었다. 주은의 비명과 맞물려 달리는 차와 부딪친 감염자는 전면유리에 동그란 파열과 죽 미끄러진 혈흔을 남긴 뒤 지붕을 굴러 차 뒤로 떨어졌다. 주은이 시은의 손을 감싸쥐었다. 의주는 무심코 힘주어 움켰던 니콜라스의 손등을 놓았다. 사이드 미러로 그들을 친 감염자가 꿈틀거리며 바닥을 짚고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앞을 향했을 때는 넓게 펼쳐진 차들의 바리케이드가 목전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깨어난 감염자들이 틈새로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
의주는 출발하기 전에 니콜라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거는 조심해야 하는 상황 맞지? 그가 농담조를 꾸며내며 물었다. 니콜라스가 지나 온 주택가의 어느 골목에서 그랬던 것처럼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차를 돌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농담을 돌려주는 대신 눈을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을 때 운전대가 돌아갔고 차가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트렁크에 실려 있던 물건들이 한쪽으로 쏠리며 무게중심을 무너뜨렸다. 차머리가 후방을 향했을 때 의주는 니콜라스가 왜 긴장했는지 깨달았다. 도시를 떠나오며 그들과 마주쳤던 감염자들이 하나 둘씩 가는 길을 따라와 인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시은이를 기절시켜야 하나?
주은이 말했다. 시은이 그녀의 품에서 웅얼거렸다. 그러지 말고 똑바로 앉아. 말하며 니콜라스는 운전대 위에 손목을 놓고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는데 다음의 행동을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의주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살면서 단 두 번 보았다. 한 번은 중학생 때 가족들과 갔던 불꽃축제에서. 공중에 솟아오른 불꽃이 터질 때마다 사위가 타는 듯이 밝아졌고 사람들의 환호하는 얼굴이 면면히 빛났다가 사그라들었다. 또 한 번은 신입생 시절의 대학교 축제에서. 다른 친구들은 고등학생 시절에 한 두번씩 외부인 출입이 제한되지 않은 대학교에 숨어 들어가 성인인 척 누나들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그랬다는데 의주는 대학 축제가 처음이었고. 매일 지나다니는 것과 똑같은 길, 똑같은 공간, 똑같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음에도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주는 이질감은 의주를 묘하게 들뜨게 했다. 늦은 밤 마지막 초대 가수의 무대를 인파 속에서 기다릴 때 키가 작은 여자들이 의주의 뒤에서 하나도 안 보인다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고 의주는 한껏 낑긴 틈속에서도 몸을 비틀어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 땐 사람이 많아도 불편하지 않았다. 설레기만 했다.
감염자들은 자다가 집에서 막 나온 듯한 차림이기도 했고 외출을 위해 힘 준 차림이기도 했고 사연은 모르겠으나 전부 서로 다른 곳에서 온 것이 분명하도록 제각기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점은 좀 축제와 비슷한가. 어리거나 몸이 약한 노인들이 뒤쳐지는 건 그들의 생태계에서도 불문율인 듯 했고 다리가 부러지거나 사지가 비틀려도 움직이게 하는 힘이 그들의 비자연적인 상태를 말해주었다. 변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설명을 듣지 못했다. 어딘가에서는 연구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의주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럼 언젠가는 치료할 수 있나. 저 사람들 중 몇 몇은 원래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 때까지 나는 살아 있을까? 뒤편에서 공간을 때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들과 최초로 접촉했던 감염자가 이내 돌아와 후방유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젠 가야 돼. 의주가 말했다. 말하며 니콜라스의 손을 잡았는데 전과 달리 차가웠다. 그럼 갈게. 그가 억누른 목소리로 답했다. 이윽고 바퀴의 달음질이 시작되었다.
피해 보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인파 한가운데를 빠른 속도로 헤집고 들어가며 차체는 험악하게 덜컹거렸다. 노면의 매끄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서스펜션이 내내 덜덜거렸다. 바퀴 밑에서 무언가 터지거나 부러지는 소리가 계속되었고 유리에 피가 난사되었다. 의주는 차라리 차가 멈추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손잡이에 스스로를 지탱했다. 뒷좌석에서 새어나온 흐느낌에 주은의 달래는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눈 감아. 파열음과 엔진 소음으로 귀가 먹먹한 사이에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발화된 그 소리만이 분명해지는 시간이 있었고 축제를 벗어남과 동시에 차는 전속력으로 질주를 시작했다. 새빨개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다른 세상의 그것 같았다. 의주는 원래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니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돌아오는 길이 가는 길과 같지 않을 때는 생각보다 많다. 니콜라스는 왔던 길을 똑같이 밟지 않고 가장 먼저 보이는 샛길에서 차를 틀었다. 낯선 도시의 변두리에 멈춰 섰다. 한 번 멈췄다가, 느린 속도로 다시 출발해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허름한 빌라의 주차장 안에서 차를 세웠다.
돌아본 그는 울고 있었다. 의주는 벨트를 풀고 몸을 기울였다. 그를 벨트 안쪽에서 끄집어 내 품에 안았다. 고개가 내려오는 느낌과 함께 어깨가 축축해졌다. 괜찮냐는 물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아 등을 쓸어내리자 마주 안는 손길이 있었다. 죽은 사람들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이전까지 알았던 세계는 이제 없다는 사실을 의주도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그 밤, 의주는 모르는 사람의 침대에 니콜라스와 함께 들어갔다. 니콜라스가 혼자 자기 싫다고 했기 때문이다. 한 명 분의 침대에 비좁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옆으로 시선을 옮기면 니콜라스는 의주를 향해 모로 누운 채 눈을 오랫동안 감았다가, 자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의주가 눈꺼풀을 세 번 정도 깜박였을 때 시선을 돌려주었다. 그가 지나치게 편안해 보여서 의주는 일순 자신이 그를 오랫동안 알아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 순간 니콜라스가 입을 열었다.
의주. 말 걸고 싶은 때가 많이 있었어.
학교에서?
응.
그래서 이름을 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