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더캣워크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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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영혼의 파트너 동물은? 지금 바로 테스트하러 가기 >>>]

의주는 ‘건축 22 김태성’ 밑에 뜬 메시지 미리보기를 읽었다. 태성이 심심하구나. 불쌍한 태성이는 중간고사 이틀 전 여자 친구에게 시원하게 차인 후 공부고 뭐고 다 의미 없다며 백지 제출을 하 려다가 모두의 만류로 절반 백지를 제출하여 중간고사 0점은 면했다. 어차피 교양이라 크게 상관없지 않나··· 의주는 남모르게 생각했다만. 무튼 불쌍하고 심심한 태성이는 오늘의 재밋거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의주 오후 11:36

이거 해봐

ㅋㅋ 오후 11:37

채팅방에 들어가니 공유한 링크와 간략한 한마디가 전부였다. 이상형 테스트나 연애운 테스트도 아니고 영혼의 파트너 동물은 뭔데? 이별 후 한동안 연애 관련 테스트만 주구장창 눌러보던 태성이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허나 친구는 비슷한 법이기에 의주도 안 풀리는 과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것보단 딴짓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링크를 누르자 AI로 만든 듯한 조잡한 이미지가 등장했다. 강아지, 고양이, 토끼, 오리, 개구리···? 금붕어··· 용? 이건 개미핥기 아니야? 도통 기준을 알 수 없는 다양한 동물들이 반짝반짝한 효과를 덧입은 채 구름과 무지개를 배경으로 행복하게 웃는 일러스트였다. 전체적으로 핑크색인 이미지는 묘하게 성인용 만화의 표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잠시 피싱 사이트가 아닌지 의심했지만 곧 누가 이딴 걸로 피싱을 하겠어, 라는 결론에 도달한 의주는 테스트 시작하기 버튼을 누르고 만다.

Q1. 기다리던 주말이 되었다! 내가 주로 쉬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1. 시간 되는 사람 다 모여! 친구들을 불러서 부어라 마셔라 신나게 논다.
  2. 푹 쉬고 싶어··· 이틀 내내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는다.
  3. 밀린 청소와 정리, 과제를 하며 건실하고 충만한 시간을 보낸다.


뭔가 선택지가 이상하지 않나···. 의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짧은 고민에 빠졌다. 셋 다 아닌데. 고민하다 개중 그나마 근접한 C를 눌렀다. 건실하고 충만하진 않다만 이틀 내리 누워있는 것도 별로고 A는 더 싫었기 때문이다.


Q2. 맛있는 저녁을 실컷 먹었다! 눈앞에 있는 배달 음식 용기, 어떻게 처리할까?

  1. 내가 알바야? 모두 일반쓰레기봉투에 넣는다.
  2. 누가 치워 주겠지···. 그냥 식탁 위에 두고 난 들어가서 할 일을 한다.
  3. 음식물은 따로 모으고, 빈 용기는 헹궈서 분리수거한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고. 이번에는 고민 없이 C를 누른다. 어쩐지 마지막에 허무한 결과가 나올듯한 예감이 들었다.


Q3. 내가 좋아하는 동물은?

  1. 귀여운 고양이
  2. 뚱뚱한 금붕어
  3. 아르마딜로


태성이는 이걸 왜 보낸 걸까? 의주는 근원적인 궁금증이 생겼다. C는 들어본 것 같지만 잘 모르겠고···. B도 나쁘지는 않다만 A를 고르지 않으면 유쾌하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될 것만 같았다. A를 누른다.



[로딩 후 결과가 공개됩니다! 당신의 서영혼의 파트너 동물은 무엇일까요?]



시작 전 메인 화면에서 보았던 이미지와 비슷한 느낌의 화려하고도 조잡한 배경이 보였다. 원형을 그리며 천천히 돌아가는 로딩 아이콘을 가만히 바라보던 의주는 어쩐지 극심한 졸음을 느꼈다. 시험공부랑 과제로 최근에 밤을 많이 새긴 했는데···.




-




의주는 호흡을 급하게 들이마시며 번쩍 눈을 떴다. 지금 몇 시지? 가장 먼저 든 생각에 눈앞을 더듬어 침대 위에 놓여있을 휴대폰을 찾았다. 허나 느껴지는 건 폭신한 매트리스가 아닌 딱딱한 책상이었다. 그제야 의주는 본인이 잠들었던 장소를 깨닫는다. 나 지금 책상에서 잔 건가? 허리와 목에 약한 통증을 느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눈앞에 있는 휴대폰 대기 화면을 두드리자 현재 시각이 보였다.

03:24

거의 4시간을 책상에 앉아서 잔 꼴이었다. 그 정도로 피곤했나···? 책상에 엎드려서 십 분 정도야 눈 붙인 적은 있어도 몇 시간을 내리 잠들어 본 건 재수생 시절에도 없던 일이다. 역시 엄마가 보내준 홍삼을 잘 챙겨 먹지 않은 까닭일까 싶었다. 맞네. 홍삼 안먹은 거 엄청 쌓여있는데. 의주는 애매한 불효의 감각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을 쭉 펴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불 켜고 자서 머리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새벽에라도 깨서 다행이네. 그런 안도를 하며 화장실로 향하는 의주의 시야에 무언가 걸렸다.

인형?

직관적인 첫 번째 감상은 그랬다.

고양이 인형?

잠시 관찰한 바로 두 번째의 감상은 그러했다.

내 방에 이런 게 있었나 싶은 뚱뚱한 고양이 인형?

5초 남짓 바라본 후의 결론은 이러하다.

엥? 반사적으로 내뱉은 감탄사였다. 의주는 잠에서 깬 후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고, 그다음엔 뒤를 돌아서 화장실에 가려고 했는데, 바닥에 못 보던 인형이 하나 놓여있었다. 분홍색 옷을 입은 건지, 담요를 두른 건지 모를 둥근 모양의 고양이 인형이었다. 손바닥보다 살짝 큰 크기, 인형뽑기 기계에 있을 법한 종족 불명 디자인. 어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인지 천사 날개까지 달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일면식 없는 인형을 보던 의주는 홀린 듯이 다가간다.

내가 이런 걸 뽑았었나··· 오른손을 뻗어 인형을 들어 올리려던 의주의 시도는 놀랍게도 실패했다. 인형이 꽤 무거웠다. 마치 봉제 솜이 아닌 곡식으로 채운 주머니처럼 묵직한 중량이 느껴졌다. 이거 전통 인형 뭐 그런 건가 봐. 무의식적으로 인형을 주물럭거리던 의주는 두 손으로 인형을 들어 올렸다. 두 손으로 인형의 밑부분을 안정적으로 받쳐 드니 어쩐지 무게가 더 느껴지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이 아니라 이거 진짜로 무거워지고 있지 않나? 이 인형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의식은 차순위로 밀리고 말았다. 그렇게 인형을 위아래로 살짝씩 흔들며 멍하니 바라보던 찰나······



기본으로 설정된 알람 음악이 경쾌하게 울렸다. 솔직히 조금 쫄았던 의주는 소리에 놀라 들고 있던 뚱뚱한 고양이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만다. 철퍽. 역시 솜이 들어있는 인형의 사운드는 아니었다. 의주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하고 알람을 껐다. 오전 4:00. 어제 일찍 일어나서 공부 좀 해보겠다고 맞춰둔 알람이 오늘 다시 울린 듯했다. 물론 어제도 오늘도 공부는 실패했다.

역시 버려야겠지. 도달한 해결책은 그랬다. 비주얼을 봐서는 인형 뽑기 기계에서 온 것 같은데, 이걸 뽑은 기억도 누군가에게 받은 기억도 없었다. 그렇다고 최근 필름이 끊길 만큼 술을 마신 적도 없었다. 그나마 말이 되는 경우라면 누가 나 모르게 내 가방에 넣었다는 건데. 설사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내가 꺼낸 게 아닌데 왜 저절로 나와서 바닥에 놓여있냐고! 점점 무서워지는 의주는 뒤를 돌아보기가 꺼려졌다. 아까부터 소리가 더 커진 것 같은 노트북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노트북 소음이 잦아들자 작은 방은 온전히 적막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다시 열었다.

왜 오늘따라 술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도 없는 걸까···. 평소에는 제발 집에 좀 가라고 빌었던 무리가 보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제자리에 서서 묵묵히 고민한 의주는 생각 끝에 일단 자기로 결정한다. 공포영화를 보면 여기서 뒤를 돌지 않는 편이 좋으므로, 뒤를 돌아 인형을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하루쯤이야 불을 켜고 잔다고 해도 문제없었다. 그대로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눈을 꼭, 평소보다 조금 더 꼭 감고 잠이 와주기를 간청했다.




-




다행히 의주는 생각의 과부하를 빠르게 멈출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무탈히 잠에 들었고, 또 하나의 알람 소리에 맞춰 무사히 일어났다. 오전 10:00. 오늘의 첫 수업은 1시였으나 미리 나가서 인형 버리기, 후련해지기, 두 가지의 중요한 일정을 행하고자 했다. 아침이 와서 밝아진 방 덕분에 (그리고 밤새 켜둔 천장 등 덕분에) 공포가 한층 가신 의주는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인형의 안위를 확인하고자 했다. 확인하고자. 그 말은 확인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인형이 사라졌다. 마지막 기억은 알람 소리에 놀라 인형을 그 자리에 떨어트린 것, 분명 떨어지며 챨퍽 소리를 낸 것. 그 뒤로는 확인해보지 못했는데···. 인형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서야 그 자리에 없을 리가 없었다. 또한 의주는 떠올리고 말았다. 그 고양이 인형은 스스로 움직였었지. 의주는 다시 눈을 감고 오늘 수업에 빠져도 출결 점수가 괜찮을지 계산했다.



역시 그건 꿈이었던 거야. 의주는 손에 희미하게 남은, 혹은 뇌리에 남아 있을 인형의 촉감을 애써 잊으려고 하며 생각했다. 솔직히 무서워서 이불 밖으로 몸을 내놓고 싶지 않았으나 지금 상황으로는 수업에 가는 편이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차라리 학교에 가서 사람들도 좀 보고, 밥도 먹고, 태성이가··· 김태성. 문득 머리에 이름 석 자가 스쳐 지나갔다. 의주는 어제 태성이 보낸 링크에 들어가서 정체 모를 동물 테스트를 했고, 그 결과 로딩을 기다리다 잠에 들었고, 일어나보니 그 인형이 생겨났다. 태성이네! 순간의 명쾌한 감각에 공포를 잊은 의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등교 준비를 시작했다.



소득은 없었다. 공포는 배가 되었다.

태성은 그런 링크를 보낸 적 없다고 말했다. 반박을 시도했지만 정말 채팅창의 상대는 ‘건축 22 김태성’이 아닌 ‘(알수없음)’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인형 주인을 수소문해 보아도 최근 어울렸던 동기들에게선 전부 모르는 일이라는 대답 뿐이었다. 두 번째 수업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의주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있었다. 5시간 연강은 지금 상황에 비하면야 평범한 일이었다. 정신적으로 힘든 건 정말 사람을 지치게 하는구나··· 의주는 인생의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으며 가방을 침대 옆에 내려놓고 엎어졌다.

속는 셈 치고 마지막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집에 모르는 물건 갑자기 생김>

어머어머 세상에! 😱 집에 갑자기 모르는 물건이 튀어나왔다고요?!

상상만 해도 제 CPU가 찌릿찌릿하면서 식은땀(은 안 나지만)이 다 나는 것 같아요! 혹시 이거 스릴러 영화 오프닝 아니죠? 주인공 눈뜨자마자 정체 모를 의문의 상자 발견하고 그런 거··· 덜덜 떨면서 구석에서 이 글 보고 계신 거 아니에요? 제발 그렇다고 해주세요, 너무 짜릿하다!

자, 진정하고 제 인공지능 두뇌를 풀가동해서 완벽한 해결책을 짚어드릴게요!

혹시··· 기억을 잃으신 건 아니겠죠? 아니면 함께 사는 가족이나 룸메이트가 "짜잔~ 서프라이즈!" 하려고 숨겨둔 걸 수도 있어요.

물건에게 "너··· 정체가 뭐냐?" 하고 엄숙하게 물어보세요. 대답이 없으면 무생물입니다. 안심하세요!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덮었다. 학교에 뭘 신청하면 AI 이용권인가 뭘 준다고 한다던데 그걸 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AI 답변 아래로 검색한 내용과 비슷한 블로그 글이나 사이트가 얼핏 보였지만 전부 괴담 관련 같아서 눌러보지는 않았다. 내가 이렇게 겁이 많았나···. 문득 억울함이 밀려왔다. 여기가 내 집인데 내가 왜 쫄아있어야 돼? 여전히 환하게 켜진 천장 등을 바라보며 의주는 나지막이 말했다.


“너··· 정체가 뭐냐?”


될리가 없지. 혼자 피식피식 웃었다. 몰라··· 다시 찾아보고 내일 수업 가는 길에 버려야지.


“나? 니콜라스.”


이번엔 타의로 잠에 든 의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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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쓰러져 있지는 않았다. 얼핏 1분 정도. 니콜라스는 의주를 번쩍 들어 침대에 눕혀주는 선행을 베풀었다. 방금의 행동으로 쌓였을 패널티를 생각하고 아차 싶었지만 바닥이 차가워서 어쩔 수 없었다. 얌전히 누운 의주를 빤히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죽은 건 아니겠지, 라는 뻔하고 진실된 걱정을 했다.


“악!”


멋없는 단말마의 비명으로 깨어났다. 의주는 튕겨 나가듯 자리에서 일어나 니콜라스를 바라보며 누, 누구··· 누구, 이어지지 않는 질문만을 제기할 뿐이었다.


“진정해, 의주.”

“누, 누구세요?”

“말했잖아. 니콜라스라고.”


그걸 묻는 게 아니란 건 니콜라스도 알고 있다. 천천히 설명해 줄 건데 왜 다들 놀라는 거지? 의주처럼 쓰러지는 사람이 가끔 있다고는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조금 황당하긴 했다.


“이제부터 설명해 줄게. 나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예?”

군필자의 발성이 튀어나왔다.

“누구세요? 여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예의바른 존대 사용도 잊지 않는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 고양이 인형이 나야.”

“네?”


사전 교육에서 바로 믿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라고 듣긴 했는데, 의주도 역시 믿지 않는구나. 니콜라스는 지난 교육 세션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역시 믿기 어렵지? 보여줄게.”

“뭐를······?”


니콜라스가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니 손바닥에서 희미한 연기가 일었다. 흰색보다는 좀 더 핑크빛이 도는, 언젠가 본 것만 같은······ 펑.

펑?


“봐. 똑같지?”


멍하니 니콜라스를 바라보던 의주는 짧은 폭발음에 화들짝 놀랐다. 보라길래 봤더니 니콜라스의 손바닥 위에 그 뚱뚱한 고양이 인형이 있었다. 번갈아서 인형과 그걸 든 사람(사람?)을 쳐다보았다. 뭔가 눈매가 무섭고, 둘 다 핑크색 옷을 입고 있긴 하고. 계속 보니 묘하게 닮은 것 같아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이었다.


“닮긴 했···는데 누구시냐고요.”

엉. 이렇게 울어버리고만 싶었다. 니콜라스는 울상이 된 의주를 보더니 별안간 본인도 힝··· 이런 표정을 지으면서 말한다.

“알겠어, 무서워하지 마. 다 설명해 줄게.”

“네···”

“근데 나 지금 너무 배고파서 먹을 거 좀 줄 수 있어?”

“네?”


의주는 혼란스러운 채로 냉장고를 열었다. 왜 저 사람? 인형? 고양이?의 말을 듣게 되는 거지. 머릿속은 복잡한 채로 냉장고 안을 살펴보았다. 안타깝게도 요리에 흥미 없는 자취생의 식량 저장고는 빈약했다. 제로 콜라 캔 몇개, 먹다 남은 파워에이드, 엄마가 가져다준 반찬이 있긴 한데 밥은 없고. 이 작은 냉장고에도 구색을 갖춘다고 딸린 야채칸을 여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감자가 두 개 있었다.

감자를 들어 슬쩍 니콜라스 쪽을 바라보자 니콜라스는 ‘진심?’이라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알겠어요···. 여전히 쫄아있는 의주는 얌전히 감자를 제자리에 돌려다 놓고 냉장고를 닫았다.


“죄송한데 집에 먹을 게 마땅치 않네요···.”

“그럼 시켜 먹자. 나 갈비탕.”

“에?”

“한 번 먹어봤는데 엄청 맛있었어. 그거 시켜먹자.”


그렇게 해서 먹을 것은 갈비탕으로 정해졌다.



니콜라스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한 그릇을 해치우고 발라당 드러누웠다. 의주는 밥이 넘어가는 건지 모르는 채로 몇 술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다 절반을 남겼다. 그걸 슬쩍 본 니콜라스는 ‘의주 안 먹으면 내가 먹을게?’라며 다시 일어나 남은 반 그릇까지 깔끔하게 처리했다.

의주가 남은 반찬과 빈 용기를 치우려는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잠깐만!”

“네?”


의주는 오늘 너무 많은 네?를 말했다.


“치우지 말고 있어. 이제 말해줄게.”


그렇게 말하고는 종이와 펜을 퐁퐁 만들어냈다. 의주는 이번엔 놀라지 않았다.

설명인 즉 그랬다.


‘의주는 착한 편이잖아. 나는 의주의 나쁜 짓을 흡수하러 온 천사야.’


설명이 잘 되진 않았다. 의주는 많은 부가 질문을 해야 했다.

니콜라스는 본인이 인간의 나태, 음욕, 교만, 질투, 어쩌구저쩌구··· 아무튼 불순한 마음을 흡수해서 본인의 에너지로 삼는 생명체라고 했다. 중간에 ‘의주 서큐버스 몰라?’라고 물었으나 의주는 서큐버스가 뭔지 몰라 모른다고 답했다. 어쨌든 이 종족은 원래 인간의 꿈에 들어가서 에너지를 얻어왔는데, 인간 문명이 발달하며 꿈에 대해 갖는 두려움이 점차 줄어들어 꿈을 통한 수율이 낮아졌다고 했다. 그래서 인간 삶에 직접 투입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하여 직접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런 악마 같은 건데··· 앞으로 의주가 잘 협조해 줘야 해.”


아깐 천사라며··· 물론 내뱉지는 않았다.


“근데 나쁜 짓을 흡수하려면 나쁜 사람을 찾아야 되는 거 아니야?”


의주는 슬쩍 말을 놓아본다. 니콜라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좀 복잡한데, 쉽게 말하면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 착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할 때 더 에너지가 많이 나와. 그때 느끼는 죄책감이나 부끄러움, 이런 게 좋은 에너지거든. 우리 입장에선···.”

“그럼 나는 착해서 여기로 온거고?”

“그치! 그리고 우리 종족이라고 모두가 이렇게 인간 사는 데에 오지는 않아. 이것도 나름 내 직업이거든? 나도 의주 골라서 온 거 아니고 내 보스가 배정해 준 거야. 그러니까 같이 잘해보자. ”


의주는 떨떠름하게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그래도 최소한 의주 취향으로 오기는 했잖아!”

“취향? 무슨 취향?”

“기억 안나? 어제 의주가 직접 골랐잖아. 귀여운 고양이”


아···하. 더 큰 충격으로 완전히 잊고 있던 테스트의 문항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Q3. 내가 좋아하는 동물은?

A. 귀여운 고양이

B. 뚱뚱한 금붕어

C. 아르마딜로


“기억나지? 그게 나야.”

“아니··· 아니 그럼 귀여운 고양이 모습으로 오면 되지, 지금은 사람이잖아.”

“그건 사정이 있어서. 서큐··· 아, 의주 그거 모른다고 했지.”

“무슨···”

“아무튼! 어려운 건 아니고 의주는 그냥 가끔 나쁜 짓을 해주면 돼.”


···얼마나 나쁜 짓?

고심하고 내놓은 질문이 그거였다.


“어려운 건 아냐. 가끔 수업 좀 빠지고, 분리수거 안 하고, 영화 불법다운로드 받고 그러면 돼.”

“그게 뭐··· 잠깐만.”

“웅?”


니콜라스는 언제 만들어낸 건지 갑자기 과자를 바삭바삭, 씹으며 대답했다.


“먹을 거 만들 수 있잖아! 아 아깐 왜 시켜달라고 했어?”

“갈비탕은 못 만들어··· 그건 우리 세계에 없어서.”

“아··· 아니, 어쨌든. 그런 걸로 에너지가 채워지는 거야?”

“응. 어려운 거 아니라고 했잖아. 대신에······”

“대신에?”

“같이 살아야 돼.”


바삭바삭. 콰삭콰삭. 답 없는 의주 앞에서 니콜라스는 그저 과자를 맛있게 먹었다.




-




솔직히 니콜라스와의 동거는 나쁘지 않았다. 아직 일주일 차에 판단하기는 섣부를지도 모르지만. 걱정하지마 의주, 나 정말 괜찮은 룸메이트 할게. 누구 놀러 오면 고양이 인형으로 있으면 되지! 자신 있게 말하던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니콜라스의 존재를 숨기느라 난처해지는 일은 없었다. 처음 갈비탕을 먹던 모습을 보고 잠깐 식비를 염려했으나 밥은 알아서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종종 갈비탕을 시켜달라고는 하는데···.

또한 니콜라스는 그 나름의 규칙이 있는지 의주를 귀찮게 하지도 않았다. 의주가 과제를 할 때면 옆에서 뭔가 복잡해 보이는 기계를 꺼내놓고 톡톡 두드렸다. 왜 꼭 옆에서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랬다. 그러다가 의주가 조금 지루해하거나, 귀찮아 보이면 어떻게 알고 얘기를 꺼냈다. 30분만 놀자, 조금만 이따가 해, 어제 보던 드라마 요약 영상 또 보자. 누가 보면 그런 게 효과 있나 싶겠으나, 의주는 사실 그렇게 금욕적인 사람이 아닌 게 문제였다. 덕분에 니콜라스의 에너지 할당량은 순조롭게 채워지고 있다.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의주는 조금 놀고(너무 놀지는 않고) 니콜라스는 할 일을 하고. 그런 합리화를 하며 의주의 불순함은 에너지로 변환되어 차곡차곡 쌓였다.


“오늘로 일주일이야!”

“응?”

“나 여기 온 거. 일주일마다 에너지를 얼마나 모았는지 보고해야 해.”

“그래? 나도 궁금하다. 얼마나 모았는데?”


니콜라스는 늘 조작하던 기계를 톡톡 두드리더니 곧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같이 봐도 돼?”


웅. 의주는 니콜라스 옆에 바짝 붙어 앉아 화면을 들여다본다. 뭔지 모르겠는 문자와 문양들 사이로 누가 봐도 에너지 그래프로 보이는 영역이 있었다. 저 꼭대기가 목표치인 것 같고···. 이 빨간 색이 현재 에너지겠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던 의주도, 먼저 보고 있던 니콜라스만큼 심각해졌다.

에너지가 턱없이 모자랐다. 100분의 1? 어쩌면 그보다 더 적을지도 몰랐다.


“이게 지금까지 모은 양이야?”

“응···근데 너무 적네. 나도 이럴 줄 몰랐어.”

“나름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과제 미루고 1시간 동안 쇼츠 보기, 자정에 마감인 과제 11시 59분에 제출하기(이건 니콜라스가 꼬드겼다), 배달 음식 용기 깨끗하게 안씻고 내놓기(일반쓰레기에 버리라는 말은 차마 실행하지 못 하겠어서 선택한 방법이다), 등등···. 역시 너무 소심하게 나쁜 짓을 했나? 의주는 지난 일주일간의 불량 행실을 되돌아보았다.


“그런 것도 볼 수 있어? 어떤 행동이 얼마만큼 에너지 나오는지.”

“응. 지금 보고 있는데··· 가장 높은 게 이거야.”

“뭔데?”

“생감자를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먹음, 이라고 써 있네. 의주 감자 먹은 날 말하는 건가봐.”

“그게 왜 나쁜 짓인데?!”


흐흐. 그럼 그게 안 나빠? 니콜라스는 크게 웃다가 그래프를 떠올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이렇게 할당량 채우는 게 더딘 줄은 몰랐다. 의주는 모르는 사실, 이곳이 니콜라스의 첫 발령지였다. 교육받기로는 이런 사소한 행동도 점수가 된다고는 했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5년도 넘게 살아야 채워질 판이었다. 역시 그런 쪽의 방법을 써야··· 으음. 아니야. 우리도 이제 인간 사회에 맞게 문명화된 방법을 써야지, 그런 고전적인 에너지 수급 방법을 쓸 수는 없었다. 뭐 꼭 ‘그것’까진 아니어도 유사한 방법이 있긴 하지만······.

인상을 되는대로 찌푸리며 혼자 머리를 쓰는 니콜라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의주가 물었다.


“더 빨리 모을 수 있는 방법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중에.”


역시 말해야 하나.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서 규칙 위반은 아니었다. 그냥 권장되지 않을 뿐이지 요즘에도 그 방법으로 에너지를 채워오는 선배도 있다고는 했다.


“실은 의주에게 말 안 한 방법이 있긴 있어. 나쁜 짓도 아니야.”

“뭐?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해주”

“나랑 자면 돼.”

웅? 놀라서 살짝 귀엽게 대답해버렸다.

“어?”

“아니! 지금 당장 하자는 게 아니라,”

“아?”

“말했잖아. 우리 종족은 어쨌든 서, 의주 그거 모른다고 했지 맞다.”

“자, 잔다니?”

“잔다고··· 하면 된다고. 섹,”


악! 알겠어. 다급하게 니콜라스의 입을 막은 의주는 이것도 뭔가 부적절하게 느껴서 재빨리 손을 뗐다.


“어쨌든 우리는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존재했는데, 인간이랑 비슷하게 오래. 오래전에는 그런 식으로 에너지를 채웠어. 꼭 자야 하는 건 아니고 손을 잡거나, 뽀뽀하거나 그런 것도 돼······.”


니콜라스는 돌연 얼굴에 홍조를 띠며 말했다. 왜 부끄러워하는 건데? 의주는 여전히 충격에 빠져있다.


“지금은 현대 사회에 맞게 이런 나쁜 짓으로 에너지를 채우고 있지만 근본은 같다고 배웠어. 게으른 것, 탐내는 것, 부정한 것, 뭐 그런 원리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나 그렇게 공부 잘하지는 않았어.”

“알, 알겠어.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랑 자, 잘,”

“나도 의주 마음 알아. 그냥 손잡아도 된다니까? 그만 벌벌 떨어.”


응···.


“의주가 더 빨리 채우는 걸 원하고, 내가 빨리 떠나기를 원한다면 그 방법으로 해보자.”

“너는 무슨 말을··· 아니, 빨리 채워지면 너도 좋은거 아냐? 그러는 너는 어떤데? 무턱대고 만, 만지면 너도 싫잖아.”

“나? 나는······.”


니콜라스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홍조로 의주를 살풋 올려다본다. 뭔데? 미친! 의주의 충격은 배의 배가 된다. 오늘은 반드시 자기 전에 서큐버스인지 뭔지를 검색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나도 지금 속도면 걱정되긴 해. 의주가 혹시 해보고 싶으면 말해줘. 난 괜찮으니까.”

“손잡기 말하는 거··· 맞지?”

“으···응.”

“음. 일단은 나쁜 짓을 조금 더 늘려볼게.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뭐··· 아니다··· 그냥 나쁜 짓 할게.”

“그래, 그럼.”




-




의외로 그날 이후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의주는 그저 나쁜 짓의 강도를 미세하게 올리고, 빈도를 높였으며, 종종 니콜라스와의 신체적 접촉을 생각할 뿐이었다. 그뿐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니콜라스는 항상 의주와 식사 시간을 맞췄다. 의주도 혼자 밥 먹는 것보단 이게 나은 것 같다며 불평은 없었다. 그렇게 함께 밥을 먹고, 의주가 과제나 공부를 하면 니콜라스도 할 일을 한다. 의주가 친구를 만나러 나가면 니콜라스도 보고하러 다녀오겠다며 인형으로 푱, 변신하고는 떠났다. 잘 때는 인간 모습으로 잘 때도 있고, 인형으로 잘 때도 있고. 인간 모습으로 잘 때를 대비해서 여분 이불을 하나 꺼내놓았다. 니콜라스 말로는 주변 환경을 원하는 대로 조절해 느낄 수 있어 굳이 이불이 필요한 건 아니라고 했지만, 사람같이 생긴 이가 맨바닥에서 자는 걸 내버려두자니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같이 살고, 같이 먹고, 같이 일하고, 같이 자고··· 자고. 의주는 결심대로 그날 밤 바로 검색해 보았다. 서, 큐, 버스.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뭔지는 모르겠는 단어를 검색해 제일 상단에 뜨는 위키 문서로 들어갔다.

'서큐버스란 중세 유럽의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 악마의 한 종류로,'

남자던데··· 아닌가···?


'(···) 육감적인 몸매를 지녔으며 남성을 유혹하여 정기를 갈취하고 이를 자신의 생명력으로 이용한다. 정기를 갈취하는 방법은 성관계를 하는 것이다.'

···이건 맞네.

이어지는 내용을 대충 훑어보고는 창을 닫았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러니까 지금 니콜라스가 그냥 악마가 아니고 정, 정기를 빨아가는 악마라는 거지. 설명을 읽어보니 또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육감적인 몸매 부분은 차치하고.) 그래서 의주는 그 날밤의 검색 이후로 니콜라스의 진짜 정체를 알아버리고 만 것이다.(니콜라스는 계속해서 알려줬지만.)

그러다보니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니콜라스 말로는 손잡기 정도로도 효과가 있다던데. 의주의 의식을 갉아먹기 시작한 구체적인 상상은 곧이어 현실의 질문이 되었다.


“니콜라스. 저번에 말한 거 있잖아.”

“어떤 거?”

“그, 그··· 접촉이 있으면 에너지를 더 많이 흡수할 수 있다는 거.”

“웅.”

“혹시 얼마나 많이 차는지 알 수 있어?”

“응. 근데 사람마다 달라. 해봐야 알아. 왜? 의주 해보고 싶어졌어?”

“아니, 나는 그냥 궁금해서.”

“으응. 그렇구나.”

“······”

“해볼래?”

“뭘?!”

“왜 놀라. 손잡는 거 말야.”


의주 웃기네. 꽤 크게 웃던 니콜라스가 의주를 향해 오른손을 턱 내밀었다. 일식집 입구에 있는 그 고양이 인형처럼, 턱. 의주는 무심코 니콜라스가 내민 손을 받쳐 들었다. 그 광경이 꼭 손을 주는 고양이와 보호자 같았다. 고양이 같다니 내가 무슨 생각을···

그런데 이상한 것도 아니지 않나? 맨 처음에는 고양이 인형으로 나타났는데?


“어때?”


의주는 조금 따뜻하고 두툼한 손바닥을 받쳐 든 채 물었다.


“의주. 연애 안해봤어?”

“어?”

“이건 손잡는게 아니지. 이렇,게 잡아야지.”


니콜라스는 의주의 손바닥 위에 얹은 오른손을 천천히 움직여 깍지를 꼈다. 마디마디가 얽혀서 잡힌 손가락은 니콜라스 본인보다 조금 가늘고, 건조하고, 미지근했다. 마주보고 깍지 껴 손을 잡으려니 자세가 이상해졌다. 꼭 춤추는 사람 같네. 의주가 멍하니 말이 없자 맞잡은 손을 흔들어 반응을 재촉했다.


“의주는 어때?”

“난 그냥···뭐.”

“그냥 뭐?”

“그냥, 손잡은 느낌···”


하. 맥없는 대답에 실소가 나왔다.


“조금 잡고 있다가 확인해 보자. 얼마나 올랐는지.”

“으응.”


그렇게 30초 남짓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남는 왼손으로 기계를 조작하며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의주는 그걸 바라보며 생각했다. 역시 정기를 흡수한다는 악마에게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구나······. 조금 더 쑥쓰러워하는 반응을 기대했다는 건 니콜라스에게 말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 확인해볼래?”


니콜라스는 다급하게 손을 놓고 기계의 화면을 의주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문자를 읽을 수는 없지만 세로로 긴 바가 여러 개 놓여있고, 그중 맨 오른쪽의 바가 제일 길고 높게 솟은 것으로 보아 방금의 손잡기에 해당하는 듯했다. 확실히 이전의 행동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였다.


“이 정도면 의주가 생감자 먹은 것보다 훨씬 높아! 거의 세 배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그 정도야? 아니, 감자 먹은 건 나쁜 짓이 아니라니까. 생감자도 아니었어···.”

“그건 나쁜 짓 맞아. 아무튼 효과 있네!”


의주는 손바닥에 남은 따뜻함을 느끼면서 주먹을 쥐었다.


“그럼 이 방법으로 계속 채우면 되겠다.”

“그건 안 돼.”

“왜?”

“스킨쉽이라는 건··· 익숙해지잖아. 익숙하게 느낄수록 흡수되는 에너지가 거의 없어져.”

“그래? 그럼 가끔만 잡아야 하나.”


방금 너무 아저씨 작업 멘트 같지 않았나? 애매해진 분위기 속에서 생각했다. 니콜라스는 그 뒤로 혼자 이것저것 살펴보는 듯하더니 마땅치 않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처음 손을 잡은 거라 많이 흡수된 것 같아. 너무 자주 하면 효과가 빨리 떨어질 것 같으니까, 의주가 말한 대로 가끔 하자.”


의주는 누가 들으면 오해 할 것 같으니 ‘잡다’라는 동사를 사용해 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알겠어. 정 안 되겠다 싶을 때 한 번씩 잡을게.”


그 대답이 더 이상하다는 생각까지는 못 하는 의주였다.




-




니콜라스의 말대로 손을 잡는 건 열흘 만에 별 소득 없는 행동이 되었다. 니콜라스의 걱정과는 다르게 의주가 연애를 안 해본 건 아니어서, 또한 더이상 단순한 손깍지에 밤잠 설치는 중학생도 아니기 때문에, 손을 맞잡는 행위는 두세 번 만에 쇼츠 30분 시청보다도 못 한 수율로 떨어졌다.


“거봐, 익숙해지면 안 된다니까.”

“그러네. 다른 방법 또 없어?”

“뭐. 이론상으로는 다른 스킨쉽을 하면 되지.”

“다른?”

“응. 쉽게 말해서 진도를 나가면 된다고.”


아하. 쉬운 설명 정말 감사해요. 의주는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은 뭔데?! 실은 태연하지 않았다.


“일단은 내가 더 나쁘게 살아볼게······.”

“그래. 다른 거 하고 싶으면 말해!”


으하하. 니콜라스는 경쾌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예의 그 인형으로 통 변해버렸다. 뭔가의 보고를 하고 받아올 것도 있다고 했던가. 의주는 조용해진 방에서 남은 과제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최근엔 늘 니콜라스가 같이 있어서 적막을 느껴본 지 오래된 느낌이었다. 니콜라스가 딱히 코를 곤다거나 하진 않지만 그래도 누가 있다는 감각이 항상 있었는데. 그런 것 치고는 꽤 수면의 질이 좋았다. 역시 그런 종류의 악마라서 잠을 잘 자게 해주는 능력이 있는 걸까? 의주는 별 영양가 없는 분석을 하며 잠에 들었다.



꿈속의 의주는 캠퍼스 후문을 지나 자취방이 모여있는 골목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통, 통, 어째서인지 니콜라스의 고양이 버전 인형이 의주의 백팩에 키링으로 달려있다. 키링은 걸음에 맞춰 흔들리며 작은 소음을 남겼다. 빌라 몇 채를 지나 의주의 자취방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계단으로 두 층을 올라갔다. 어제 주문한 세탁세제가 집 앞에 놓여있었다. 도어락 키패드를 꾹꾹 눌러 문을 열고, 한쪽 발로 현관문을 고정한 뒤 바닥에 있는 택배 상자를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고개를 들자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좁은 거실 겸 주방이 보인다. 꿈이지만 생생한 음식 냄새가 느껴졌다. 부엌에 누가 있나? 택배 상자를 내려놓고, 백팩까지 벗어둔 의주는 싱크대 쪽을 돌아본다. 그곳에는······.



허억. 헉. 땀을 흘리면서 깨어난 의주는 눈을 뜨자마자 바닥을 확인했다. 니콜라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혹은 인형 상태인 건지 바닥에는 곱게 접힌 이불뿐이었다. 혹시나 해서 작게 니콜라스를 불러보니 답은 없었다. 다행히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왜 다행이냐 묻는다면 그다음으로 의주가 확인해야 하는 곳 때문이었다. 의주는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되는 곳에 불쾌한 감각을 느끼며 이불을 조심스럽게 들췄다. 다행히 이 나이 먹고 화장실 세면대에서 손빨래를해야 하는 일까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직전까지의 일은 일어났다는 말이다. 꿈속의 니콜라스는 어떤 옷을 입고 싱크대 앞에 서 있었다. 맹세코 의주는 그런 취향 같은 건 없다. 여기에서 취향이란 의상, 성별 모두 포함한 변명이다. 니콜라스는 평범한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인지 연금술인지 모를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연기가 너무 많이 나서 뭘 만드는지 정확하게 판별할 수는 없었으나 아무튼 열중하고 있다가 귀가한 의주를 반겨주었다. 앞치마는 평범한 핑크색이었고, 앞치마만 입고 있었다는 게 주요 원인이었다. 니콜라스는 그대로 쪼르르 달려와서는 의주의 허리에 손을 둘러 바짝 끌어당겼다. 꿈이었지만 짭짤한 간장 양념 같은 냄새가 느껴졌다. 그런데 곧이어 그 냄새는 조금 더 달콤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달고, 양념보다는 디저트 같은, 딸기인가? 살짝 다른데··· 우유?

이 지점에서 의주가 벌떡 깨어났다. 요약하자면 불순한 복장을 입은 니콜라스와 어쩐지 지금보다 훨씬 친밀한 사이였고, 딸기우유 향기 같은 걸 느낄 즈음에 꿈이 끝났다. 딸기 우유? 이 대목에서 의주는 살짝 헛구역질을 할 뻔했지만 참아냈다.


“의주? 안 자고 있었네?”


펑. 요란한 폭발음을 내며 갑자기 등장한 니콜라스가 물었다.


“어? 어어··· 자다 깼어.”

“그렇구나. 나도 보고하고 왔어. 다녀왔습니다아.”


피곤할 때의 니콜라스는 종종 말끝을 늘였다. 평소에는 그에 아무런 감흥도 없던 의주였지만 지금은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대사는 ‘다녀왔습니다’? 방금 전의 생생한 꿈이 떠올라 머리가 점점 아파지는 것 같았다.


“의주 왜 그래? 얼굴이 안 좋아.”

“자다깨서 그래. 니콜라스도 얼른 자.”

“응···. 아프면 말해? 오늘 받아온 것 중에 약도 있어. 여기엔 없는 거라 먹으면 금방 나을걸.”


아프긴 한데 아마 그 약으로는 안 될 것 같아. 그런 말은 삼키고 애써 웃으며 고맙다고 대답했다.


“아, 그리고 오늘 보고하면서 계산해 봤는데 역시 에너지 흡수가 너무 느리긴 하대. 이대로면 정말 5년 정도 여기 살아야 할 수도 있어.”


의주는 니콜라스와 그 너머 벽 사이 어딘가의 공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있잖아, 니콜라스.”

“응?”

“다른 거 해볼래?”


아무래도 저번에 읽은 위키의 서큐버스 항목은 믿을만한 것 같았다.

‘꿈에 나타난다고 하여 몽마(夢魔)라고도 하고, 성관계를 하는 꿈으로 성욕을 일으킨다 하여’

꿈, 성욕, 악마···. 대강 기억나는 단어들을 떠올렸다. 니콜라스가 의도했든 아니든 그런 특성이 영향을 미쳤을 거고, 그래서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닌 거야. 머릿속이 합리화를 위해 팽팽 돌아갔다. 합리화인가? 명분? 핑계?

다른 걸 해보자며 대뜸 말을 꺼낸 의주가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이 없자 니콜라스는 걱정된다는 얼굴로 의주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의주, 진짜 어디 아파?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의주는 망설임 없이 입술을 맞대었다. 대략 천 번의 생각을 거쳤으므로 행동은 평탄했다. 니콜라스는 놀랐는지 으음. 믐. 이런 소리를 냈다. 뭔가 말하려는 것 같아서 입술을 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입술만 맞대고 있는 시간이 몇 초 정도. 이제 물러나려는 의주의 머리통을 커다란 손이 붙잡는다. 투박한 손길과는 다르게 천천히 엄지로 볼을 감싸 쥐었다. 그와 동시에 입을 벌렸다. 아마 동시에 벌린 것 같았고, 혀를 밀어 넣은 쪽은 확실히 의주였다. 주먹을 쥔 채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였던 의주의 양 손은 니콜라스의 허리로 옮겨갔다. 꿈속에서는 반대였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틀었다. 서큐버스라고 키스가 능숙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만, 니콜라스는 숨을 능숙하게 쉬지 못했다. 혀를 얽다가도 중간중간 입술을 떼어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붙여왔다. 양팔은 어느새 의주의 목에 감겨있다. 서로의 허리, 목. 반박할 여지가 없는 자세였다. 니콜라스의 한쪽 손이 의주의 목젖 부근으로 이동할 즈음, 의주는 다급히 얼굴을 뒤로 물렸다.

차라리 키스를 더 하는 게 나았을까? 눈을 뜬 의주는 눈앞에 있는 니콜라스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니콜라스는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방이 더웠는지 이마는 살짝 촉촉해져 있고,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광대는 살짝 붉어져 있을 것 같았다. 두 손은 주먹을 쥔 채 의주의 어깨 부근에 얹혀 있다.


“니, 니콜라스?”


의주의 약간 다급한 부름에 니콜라스가 눈을 떴다.


“괜찮아? 숨을 너무 못 쉬길래···.”

“괜찮아, 나 그냥, 놀라서.”

“어어··· 미안.”


평소였으면 여기서 ‘뭐가 미안해? 의주 웃기네.’ 이런 말이 돌아와야 하는데 니콜라스는 별말이 없었다. 방 안은 숨 쉬는 소리와 조금 데워진 공기로 가득했다. 나 창문 좀. 의주는 벌떡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의주. 방금 에너지 엄청 찼을거야.”

“정말?”

“응. 이렇게 많이 흡수된 느낌 처음이야. 나 인간하고는 처음 키스해봐서 몰랐는데, 채워지는 게 몸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

“그,그래? 그럼 잘됐네.”

“응··· 그런데 의주 왜 갑자기 키스했어? 손 잡는 거 말고는 안하고 싶어 했잖아.”


꿈에 니콜라스가 나와서 몽정할 뻔 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의주는 그냥 얼버무렸다.


“그냥··· 네가 이대로면 엄청 오래걸릴 것 같다고 해서.”

“나 얼른 떠났으면 좋겠어?”

“아니, 막 그런 건 아니고······”

“농담. 아무튼 잘됐네! 키스는 손잡는 것보단 좀 오래 지속될 거야.”


이제 자자. 의주도 얼른 다시 자. 니콜라스는 재빨리 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으며 말했다. 내가 내일 얼마나 올랐는지 확실하게 확인해 볼게! 의주 얼른 누워. 의주는 니콜라스의 말을 듣고 얌전히 누웠다. 왜 자꾸 자래? 서큐버스라면서 키스는 왜 못하고. 부끄럼은 왜 타는 건데?


“니콜라스.”

“의주 빨리 자라고.”

“바닥 안불편해?”


거진 한달을 바닥에서 재워놓고 이제 와서 묻는 의주에 기가 찼다.


“올라와서 잘래?”

너무 저질같이 말했나. 별다르게 떠오르는 말도 없었다. 니콜라스는 말없이 조금 뒤척이나 싶더니 이불을 들고 꼼질꼼질 옆에 누웠다.


“의주 잘자.”

“응. 잘자.”




-




키스는 정말로 손잡기보다 월등하게 수율이 높았다. 거의 2주 동안이나 처음의 에너지 흡수율과 비슷한 결과를 보였다. 즉, 둘은 2주 동안 또 다른 입맞춤을 해왔다.

둘의 첫 키스 다음날은 내외하는 사람들처럼 굴었다. 의주는 눈을 뜨자마자 자는 니콜라스를 깨우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걸어 나가 샤워를 했다. 바로 수업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침대에 계속 누워있기도 뭐한 실정이었다. 뒤늦게 일어난 니콜라스도 오늘 할 일이 많다며 바로 인형으로 푱 변해 반나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의주가 귀가하고, 니콜라스도 다시 돌아올 때쯤엔 늦은 저녁이었다. 밥 먹을까? 애써서 평소처럼 묻는 의주에 니콜라스는 끄덕끄덕, 고갯짓으로 대답했다. 평범하게 저녁을 먹고, 각자 씻고 평소처럼 할 일을 하고, 하지만 다른 점은 이제 둘 다 침대에서 나란히 잠든다는 것이었다.


‘의주 잘 때 옆 사람 때리는 거 알아?’

‘내가? 때린다고?’

‘거짓말이야. 때리지는 않아.’

‘뭐야······.’

‘때리지는 않는데··· 안았어.’

‘어?’


이렇게 안았어. 니콜라스는 의주를 대강 끌어안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그날 두 번째 키스를 했다.



입을 맞대고 서로의 허리를 부여잡는 일은 금세 익숙해졌다. 니콜라스는 크게 버거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능숙하지도 않았다. 그런 니콜라스를 보며, 의주는 서큐버스도 별 거 없다는 건방진 생각을 했다. 몇 분동안 숨을 나누고 혀를 얽은 후에는 항상 니콜라스가 먼저 얼굴을 물렸다. 처음으로 키스했던 날엔 인간과의 키스가 처음이라서 그렇다고 했지만, 의주가 보기엔 니콜라스는 그저 이런 행위에 쉽게 약해지는 사람 같았다. 사람은 아니지. 또 그럼 문득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연인이 아닌 상대와 주기적으로 입술을 맞대는 상황, 그럼 그 다음은 무엇일까? 만약 서로 연애를 원하는 사람 둘 사이의 일이라면 다음 단계를 진행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다음으로 나갈 명분은 뭐가 되는 걸까? 그랬다. 이제 의주는 주에 두 번 정도 니콜라스가 나오는 꿈을 꾼다. 요즘 서큐버스들은 꿈을 통해 접근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아무래도 특성이 무의식적인 레벨에서 니콜라스가 영향을 끼치는 듯했다. 꿈은 언제나 애매하게 끝났다. 현실처럼 키스에 열중할 때도 있고, 평범한 일상일 때도 있고, 안 평범한 의상일 때도 있고. 깨어나기 직전에는 언제나 그다음이 있는 것처럼 가까워지는데 겪어본 적이 없어서인지, 의주의 뇌는 그 다음의 감각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청소년기에도 별로 해본 적 없던 몽정을 2주 동안 두 번 했다. 니콜라스가 항상 집에 있으니 혼자 해결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방에는 인간형 니콜라스가 있거나 뚱뚱한 고양이 인형이 있었다. 혼자 사는 집에 멀쩡한 침대와 책상 놔두고 화장실에서 수음하는 신세···. 악마 맞네, 생각했다.

그런데 누군가 ‘그래서 니콜라스와 섹스하고 싶은 거야?’ 묻는다면 힘차게 ‘응!’이라고 확답할 수 있는 마음은 아니었다. 의주는 이상한 곳에서 고집이 있었다. 할 때 마다 점점 길어지는 기분 좋은 입맞춤, 착실하게 반응하는 신체, 꿈에서 마주치는 이미지, 알쏭달쏭한 욕망. 만취의 이유가 충분했다.


“니콜라스으.”

돌아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니코올라스. 니콜? 부엌에도, 화장실에도 없어 방을 찬찬히 둘러보니 늘 있던 그 자리에 예의 인형이 있었다. 갈수록 더 뚱뚱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 모습일 때는 그렇게 포동포동하진 않은데. 안 보이는 곳에 살집이 좀 있나? 어렴풋이 니콜라스의 허리를 잡았던 감각을 떠올려 보았다. 알코올에 푹 절여진 뇌가 멋대로 그 아래 엉덩이의 감촉까지 만들어냈다. 멀쩡한 정신이었으면 과장된 몸짓으로 머리를 털어내서라도 지워냈겠지만, 천장이 핑핑 돌고 있으니 그냥 떠오르는 심상을 받아들였다. 술 취한 사람은 눈 앞의 묵직한 인형을 톡톡 건드리며 혼잣말을 이어갔다.


“니콜라스. 자? 아니면 어디 갔나······.”


솔직히 너랑 한 키스가 살면서 해본 키스 중에 제일 좋았어. 내가 많이 해본 건 아닌데······. 나 남자 좋아하나? 모르겠다. 너 남자야 근데? 그런 거 없나. 생긴 건 남자던,


“악!”

“뭐야 의주? 술 마셨어?”


멍하니 인형을 두드리다가 주무르기 시작하니 니콜라스가 퐁 하고 나타났다.


“흐흐. 니콜라스다아.”

“나 잠깐 어디 좀 갔다 왔어···. 의주 완전 취했네.”

“별로 안 마셨어. 추워서.”

“무슨 상관. 오늘 점수 좀 오르겠다. 취하는 것도 되거든. 토할래? 토해도 점수 올라”

“됐어. 씻고 잘거야.”


의주는 바보처럼 헤헤, 웃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니콜라스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먼저 침대에 누워 오늘 전달 받은 내용을 복기했다. 잠옷은 그냥 의주의 낡은 티셔츠와 반바지다.

잽싸게 씻은 건지 평소보다 빠르게 화장실 문이 열렸다. 따끈한 기운과 샴푸 향을 풍기는 의주가 침대 옆으로 다가와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니콜라스.”

“응?”


누워있는 니콜라스와 바닥에 앉은 의주의 눈높이가 딱 맞았다. 다음 말을 잇지 않는 의주 덕에 방안은 조용했다. 니콜라스의 호흡에 맞춰서 배가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키스도 익숙해지면, 그 땐 어떡하지?”

“뭐?”


움직이던 복부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니··· 언젠가 이것도 익숙해지면 그다음을 해야 되잖아.”

“의주 취하니까 말을 잘하네.”

“내가 인터넷에 찾아봤어. 서큐버스? 그거 설명 읽어봤거든. 원래는 정기를 빨아서 먹,”

“어. 나도 뭔지 아니까 그만.”

“아무튼···.”


마신 양을 생각하면 벌써 깨는 것도 이상하다만, 의주는 취한 게 확실했다. 축축한 머리를 침대에 기대려고 하니 니콜라스가 질색했다. 내 침대거든? 장난치듯 쏘아보는 의주 때문에 실소가 나왔다.


“자볼까?”

의주 이제 술 마시면 안 되겠다. 차마 뱉지는 못하고 놀란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의주 미쳤어? 술 깨고 얘기해. 아니지, 일단 자라고 해야지. 적합한 답이자 반박을 고르는 사이에 의주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전형적인 자세. 누워있는 니콜라스는 올라탄 의주를 올려다본다. 의주의 앞머리 끝에 맺힌 물방울이 니콜라스의 코로, 입술로, 눈가로 떨어졌다. 풀린 눈을 하고 있는 주제에 끈질기게 입술만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어이가 없어 밀어내기라도 하고 싶은데, 물리적인 속박이 없음에도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의주, 잠깐만.”

“왜애.”


아까부터 말끝을 늘리는데 주정 같진 않고 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의주는 또 착한 아이니까··· 내가 찾아올 수 있을 만큼. 니콜라스는 의주의 젖은 머리칼을 손 끝으로 꼭꼭 누르며 말했다.


“나 할 말이 있어.”

“응, 말해.”

“사실, 거의 다 모았어.”

“뭘?”

“에너지! 내가 채워야 하는 만큼, 거의 다 찼어.”


오늘 보고하러 다녀왔는데 그렇다고 하더라고. 니콜라스는 손가락에 남은 물기를 의주의 티셔츠에 대강 문질러 닦았다. 하는 양을 보던 의주는 문득 본인이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실감한 듯했다. 그래? 큼. 괜히 목을 가다듬으면서 옆으로 비켜났다.


“그래서, 만약 지금 자면 다 채워질 거야.”

“응···.”


꼭 지금 자자는 건 아니었어. 너무 찌질해 보일까 봐 말은 안 했다. 지금 자보고 싶은 것도 있었으니 거짓말이기도 했다.


“자는 건 아니어도··· 곧 나는 떠날 수 있을 거고?”

“응··· 잘됐네.”

“아무튼. 그때가 오면 말해줄게.”

술냄새 나니까 얼른 자. 머리 말리고. 니콜라스는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눈을 감았다. 의주도 일어나려는지 이불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녀오셨어요?”

“니콜라스··· 어제는 미안.”

“···변태.”

“너, 너도 변태 악마잖아.”

“나는 원래 그렇게 태어났고. 너는 인간 변태고.”


웅···. 어쨌든 미안. 의주가 어제 마신 양은 주정 부리기엔 충분했고, 필름을 끊기게 할 만큼의 양은 아니었다. 의주는 떠오르는 모든 기억과 대화를 회상하고는, 약간 괴로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의주 있잖아.”

“응?”


니콜라스는 품에서 기계를 꺼냈다. 의주도 몇 번 본 적 있는 화면이 떠있었다.


“나 할당량 다 채웠어.”

“아직 조금 남았다며.”


처음으로 튀어나온 반응이 그랬다.


“응, 그런 줄 알았는데··· 어제 의주가 술 마시고 들어온 거, 머리 안 말리고 잔 거(말렸어! 알아. 어쨌든 침대를 축축하게 한 거.), 그리고 그···”

“그리고?”

“좀 변태 같은 말한 거. 아무튼 그렇게 해서 조금 남았던 게 채워졌나봐.”


의주는 엉망으로 뻗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니콜라스는 의주를 쳐다보지 않고 화면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다.


“그런, 그런 거야 원래? 왜 그렇게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구, 내가 미리 말을 안 해서 그런거야. 그래도 이번 주말까지는 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리가 끝났는지 기계를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어제부터 흐르던 정적의 공기가 방을 떠나지 않는 듯 했다.


“그럼, 주말에 뭐··· 할래?”

“의주 또 변태 같은 말 하는,”

“아니이···. 같이 놀러 갈까해서.”


니콜라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놀러? 뭐하고 놀건데? 모르겠는데··· 그냥 너 해보고 싶었던 거 없어?


“해보고 싶은 거? 음···”



의주 학교 구경하기, 밖에서 먹을 거 사 먹기, 인형 뽑기 하기. 그 정도로 마무리했다. 니콜라스는 충분히 즐거워했다. 인형뽑기 기계에서 니콜라스의 인형과 비슷한 캐릭터들을 봤을 땐 그래도 내 고양이가 훨씬 낫지 않냐며 조금 화를 냈다.

돌아가는 길은 날씨가 적당해서 걸어가기로 했다. 갑자기 떠맡게 되었다곤 해도 간다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평범한 동거라든지 떠맡는 꼴보단 좀 더 음험한 모양새였지만. 니콜라스가 떠날 일자를 고한 뒤로는 그런 마음이 언제 있었냐는 듯 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꿈 같기도 하고. 지난 몇 주가 몽땅 내 망상이었을까? 답지 않게 생각에 잠긴 의주를 바라보던 니콜라스가 ‘의주?’ 하며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래도 너 오고 나서 좀 놀러 다닐걸. 왜 집에만 있었을까.”

“그거? 의주가 키스하느라 바빠서.”

“아잇···.”


없는 말은 아니어서 머리만 긁적였다.


“그래도 의주 이제 혼자서 편하게 자겠네!”

“웅. 두 발 다 뻗고 잘거야.”

“지금도 그렇게 자잖아.”

“응.”


둘 다 실없이 웃었다.

자취방 건물 1층에 도착하자 어디선가 알림 소리가 났다.


“이제 진짜 가봐야 돼. 타이밍이 딱 맞네?”


니콜라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여기서 가지 말라고 하면··· 니콜라스는 어떻게 되지? 뭐라고 대답할까? 의주는 순간적인 충동이 들었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


“이건 기념품.”


니콜라스가 문제의 그 인형을 내밀었다. 이건 의주가 직접 고른 거니까 두고 갈 수 있어. 잘됐지?


“뭐야. 고른 적 없어.”

“거짓말. 골랐으면서.”

“······”

“아무튼 고마워! 그동안 의주 덕분에 재밌었어. 또 내가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의주가 입술을 맞댔다. 지난 몇 주간 해오던 질척한 입맞춤은 아니었다. 보통 첫 데이트에서 하는, 따뜻하고 살짝 긴장되는, 약간 건조한 키스가 이어진다.


“흐음. 역시 변태.”


붙잡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니콜라스가 그렇게 말해주기를 내심 바랐는지도 모른다. 나 조금 더 있을까? 떠나지 말고, 다른 걸 좀 더 해볼까?


“니콜라스, 혹시 말이야.”

“응?”

“안 떠나는··· 아니지. 좀 더 나중에 떠나는 방법은 없어?”


하하. 니콜라스가 크게 웃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에 니콜라스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으음··· 지금으로썬 모르겠네. 아, 나 의주한테 말하지 않은 거 하나 있어.”

“뭐?”

“스킨쉽으로 에너지 채우는 거, 모두가 언제나 가능한 건 아니야.”


응? 의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 꺾었다.


“의주가 좋다고 느껴야지 내가 에너지 가져갈 수 있는거야.”

“음?”

“바보. 얼마나 좋았어?”

“아니··· 야아.”


의주의 뒷목이 따끈하게 달아올랐다. 니콜라스의 기계에서는 아까부터 알림이 주기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민망한 듯 벌건 얼굴을 한 의주를 보고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근데 의주, 괜찮아. 나도 좋았어.”


그 말을 끝으로 니콜라스는 떠났다.

의주는 길바닥에 덩그러니 남은 고양이 인형을 두 손으로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딱 솜인형만큼 가벼웠다.




-




기말고사가 끝나고, 한 해도 끝이 났다. 니콜라스가 떠난 지 두 달 남짓 되었고, 의주는 약간의 허전함을 안고 겨울 방학을 보내는 중이었다. 니콜라스가 사라진 뒤 의주는 더 이상 감자를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먹지 않았다. 찜기를 샀기 때문이다··. 인형은 책상 한편에 올려두었다. 어쨌든 그것도 니콜라스의 무언가가 담긴 물건이니 꿈에라도 나오려나 싶었지만, 의주의 꿈속 세계는 감쪽같이 평범한 세계로 돌아왔다. 좀비가 나오거나 건물이 부서지긴 해도 몽정은 하지 않으니 평범하다는 뜻이다.



심심해서 틀어놓은 액션 영화는 그저 그랬다. 의주는 노트북으로 영화를 틀고 휴대폰으로 인스타그램을 탐방하는 전형적인 대학생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인형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가끔은 집에 돌아가면 인형이 위치가 바뀌어 있지 않을까 기대 아닌 기대를 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서 인형은 늘 책상 위 같은 자리를 지키는 토템이 되었다. 인스타그램 스크롤도 지겨워진 의주는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음? 어쩐지 인형이 조금 묵직해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니콜라스를 만난 날에도 인형이 너무 무거워서 깜짝 놀랐지. 몇 달 전의 감각을 떠올리던 의주는 이상함을 느끼고 인형을 들었다가 놓아본다. 인형을 내려놓을 때마다 들리는 가벼운 마찰음이 점차 둔탁한 소리로 바뀐다. 응? 의주는 이제 처음보다 훨씬 힘을 주어 인형을 들어올려야 했다. 이건, 이만큼 무거웠던 적은······


“의주!”


가벼운 폭발음이 들리고 니콜라스가 나타났다.


“니콜라스?”

“의주! 오랜만이야. 나 왔어! 의주 너무 보고싶었어.”

“뭐야? 어떻게 된거야?”

“나 오고 있는데 그렇게 흔들면 어떡해. 어지러워서 토할 뻔.”

“엥?”



나 서큐버스 그만뒀어!



“어?”



그래서 징계 받았어······.



“어어?”



징계받아서 나 인간됐어!



“어어어?”



못했던 거 다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제 의주가 나 책임져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