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진을 고쳐야지

화




드물게 일찍 눈을 뜬 날이다. 키에 맞춰 특수 제작된 침낭에서 빠져나온 의주가 기지개를 켜며 창가에 다가섰다. 두터운 암막 커튼을 걷자, 방대한 양의 빛이 순식간에 방을 채우는 바람에 잠시 눈가가 일그러지지만, 그것도 잠시. 아직 덜 여물어 뺨이 통통한 그는 환한 빛 속에 잠길 때 가장 평화로운 표정이 된다.


[Ground ; 이곳, 추정 –7 광 하이로기 은하. 서른세 번째 행성. 02/10/3090]


새날이구나. 어딘가에서 우리는 또다시 아침을 맞이했다. 의주는 밤사이 무시무시한 온도로 식은 창문에 손끝을 올렸다. 가볍게 문지르자 뿌연 김이 손가락 너비로 깨끗이 지워지고, 그가 도착한 행성의 낯을 비춘다. 그리고 정중앙. 잿빛 땅에 축을 꽂은 무언가가 문득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순간이다.


[Ground ; 무언가 존재한다. 02/10/3090]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간단한 수칙조차 망각해 버린 듯, 다급히 창문을 개봉했다. 정화 시스템을 한 번 거친 공기가 살을 에는 기온으로 따뜻한 내부에 힘차게 밀려들며, 온몸을 잠시 흔드는 일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넋이 나간 표정의 의주는 자신이 목격한 무언가의 실체를 확인코자 창 너머로 상체를 길게 내보냈다.


  [Ground ;  ...인간이다. 02/10/3090]


정박한 우주선으로부터 십수 미터 남짓. 혹은 그보다는 조금 더 멀리. 힘껏 소리치면 대화 정도는 가뿐히 나눌 법한 거리에 서 있는 건 분명 사람이었다. 적어도 변의주의 눈에 그는 인간 남자와 다를 바 없었으므로 우선 그를 ‘남자’라고 기록하고자 한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마치 변의주가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기다렸다는 듯, 머리 위에서 멈추어 있던 오른손을 반원으로 크게 흔들었다.


뒤이어 그가 보인 행위는, 의주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길고 지난한 우주 비행 안에서 단 한 번 겪은 적도, 겪을 일도 없을, 대단히 새롭고 믿을 수 없는 기적 같던 것으로.


[Ground ; 이쪽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02/10/3090]


의주는 여태 그것을 정의한다거나, 한 마디로 기록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렇게 풀어 설명한다.


[Ground ;


남자는 두 팔로 스스로를 따뜻하게 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포옹에 그러하듯 어깨를 향해 뺨을 기울였다. 한참이 지났을까, 변의주가 엉성한 몸짓으로 마주 손을 흔들어 보였을 때에서야, 몹시 간만의 햇볕을 맞이한 사람처럼 아름답게 웃은 그가 다시 한번 온몸으로 우주를 끌어안는다. 반복되는 포옹이 빠짐없이 내게 향해 있었다. 나의 몫이었다. 따라서 나는 분명 그를 이곳에서 처음 보았음이 분명한 주제로도, 이토록 그리운 마음에 낯선 눈물을 떨어트릴 수 있던 것이다.


네가 나에게 처음으로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네던 때에 말이다. 02/10/3090]



  엔진을 고쳐야지



[Ground ; delete. 03/10/3090]


[Mars ; 대신 정정한다. 인간이 아니라 '그것'.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의 존재를 구분할 의무가 있음을 잊지 않는다. 04/10/3091]


[Mars ; 그것은 무장한 인간의 접촉에도 혼란하지 않았으며 매우 호의적인 태도로 지도에 따랐다. 다만 우주선 가까이 도착하였을 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찾는 듯한 행동을 보였으니, 짐작하건대 그것은 동료가 있고, 사회적 교류 안에 살아왔으며, 그렇기에 인간이 시도하는 소통의 의미를 이해한 것으로 기대한다. 04/10/3091]



원주민이라고요?


헬멧을 안고 가볍게 머리를 털던 의주가 반색했다. 그럴 리가 없죠. 여기 생명체가 없단 거 알고 왔잖아요. 통신기를 가볍게 누르자 공중을 차지했던 리포트가 존재를 감춘다. 그가 착의할 우주복 내부를 매끈하게 칠할 보조액을 건네던 J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리포트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몸에 나이테가 있어. 행성과 똑같이.]


그의 말에 다시 한번, 변의주의 머릿속에서 ‘남자’와의 첫 만남이 재생된다. 긴긴 인사가 끝나고, 남자는 변의주의 창이 다시 하얀 김으로 불투명해질 때까지 한참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환히 웃고 있던 때와 달리, 꼭 정체 모를 눈물을 떨어트리는 변의주가 걱정된다는 식의 표정을 하고서. 그에 변의주는 황급히 커튼을 치고 창에서 멀리 떨어지며, 뺨을 간질이는 눈물을 마구 닦아냈다. 빨리. 빨리 신고해야 하는데. 책상을 더듬어 찾은 통신기에 대고 “생명체를 발견했다”고 적는 순간까지, 변의주의 머릿속엔 이런 무의식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나는 그를 아는 것인가?

혹은 그가 나를 아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비행사를 소집한다는 경보음이 우주선을 울렸다. 남자가 만든 소란이었다.


남자와 먼저 접촉한 이들이 하나같이 늘어놓는 소리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여태 수집한 우주 언어 모두를 조합하여 해석을 시도해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먼저 접촉한 바 있던 EO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언어능력으로 추정하는 게 다였다. 끝내 인간의 접촉을 거부했던 EO로부터도 ‘이곳을 떠나라’는 의사까지는 해석해 냈던 성과에, 그 괴이한 형태를 잠시 반추한 이들은 인간과 98퍼센트 일치하는 외관의 ‘남자’와 소통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테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호출된 이가 바로, 변의주. 우주선의 유일한 아시안이자, 우주언어학자였다.


의주는 문을 열기 전, 잠시 심호흡을 했다. 적정한 산소가 충전된 우주복 내부는 항상 인간에게 꼭 맞는 온도를 유지했으며, 필요하면 언제든 그의 신체에 맞게 습도를 조절하는 기능도 있었으므로 땀이 많은 체질인 의주에겐 큰 도움이 됐다. 적어도 남자에게 긴장으로 땀에 절은 바보 같은 얼굴을 보일 필요는 없으리라.


J의 말에 따르면 남자는 인간의 접촉을 거부하지도, 그 어떤 공격성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흡사 무균실로 보이는 새하얀 방에 끌려가는 순간에도 웃고 있었기에 도리어 공포심을 느낀 대원도 있었다. ‘끌려갔다’라... 자그맣게 중얼댄 의주의 노크가 정중했다. 딱 세 번. 그리고 남자가 알아들을 리는 없지만 이렇게 말한다. “들어가도 될까요?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예상과 달리 남자는 방에 없었다. 당황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의주의 헬멧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을 느낀 건 잠시 뒤. 두터운 복장 탓에 더욱이 제한되는 행동이나, 좁아진 시야는 이제쯤 익숙해졌지만, 코앞에서 웃고 있는 낯선 존재에 멍한 얼굴을 들키는 건 조금 민망한 일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래서 변의주는 공용어도 아닌 자신의 모국어로 그렇게 인사해 버렸고, 잠시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변의주를 바라보던 남자는 이윽고 다시, 활짝 웃더니, 한 손을 들었다. 작게 흔든다. 그건 전 인류에게 통용된 비언어적 인사 행위였으므로, 싫어도 또다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인간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뭘까. 천사?


“제가 다섯 개의 행성 언어로 말을 해 볼게요. 지금 구사하는 언어는 ‘화성’. 따지자면 표준어예요. 알아들을 수 있으면 코끝을 톡톡 두드려 보실래요?”


남자는 침대에, 의주는 바퀴가 달린 좁은 의자에 앉았다. 흡사 취조가 시작되자 남자는 따분한지 시트를 손으로 긁고, 천장을 보고, 의주의 단단하고 매끄러운 헬멧을 허락 없이 만져댔다. 바깥으로 목소리를 방출하기 위해 오른 팔목의 스위치를 눌러야 하는 의주가 손이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모양이었다. 가끔 키득키득 웃는 모양이 즐거워 보였다.


“...다음은 주피터. 저희가 가장 최근 접촉했던 존재가 사용한 언어예요. 시작할게요. ‘반가워요. 우리는 당신이 궁금해요.’ ...이해했나요?”

안 됐겠지. 사실 터무니없는 짓이다. 우린 남자에게 시덥지 않게 말을 붙이고 있을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여태 그것을 망설인 적 없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지. 움직이거나, 응시하거나, 혹은 그저 곁에 오래 있었거나, 눈에 띄었다는 이유만으로 정을 가진다. 하물며 네모난 라디오 기계가 수명을 다한 데에도 슬픔을 느낀다. 그런데 이 망망의 우주에 인간의 형태를 한 존재라니, 누구도 그를 대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입에 올릴 수 없었으리라.


남자의 손바닥이 헬멧의 정면을 문지르자, 시야가 잠시 흐려지기도 했다. 그건 좋은 발견이었다. 남자에게도 체온이 있다는 증거였으므로.


“다음 비너스. ‘당신은 어떻게 이곳에서 숨을 쉬나요? 이곳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죠?’”


가까이서 보니 속눈썹도, 뺨의 솜털도 인간과 흡사하다. 아니. 똑같다. 눈동자의 홍채까지도 갖추었다. 심지어 머리칼은 구불거리는 모양으로, 의주는 자신도 모르게 거기 손을 뻗어버렸고, 잠시 주춤하던 남자는 머리칼을 만지는 손길에 얌전히 순응했다. 두터운 장갑 속에 감춘 손끝에 그 감촉이 느껴지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의주는 남자의 반응에 어쩐지 감동하고 말았다. 착하네요. 또다시 모국어로 속삭이자, 남자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내 말을 알아들었어요?”


방금은 머큐리. 아무런 반응이 없다.


마지막으로 들려주어야 할 언어는 그라운드로, 모든 우주비행사가 사용하는 공용어였지만, 어쩐지. 시선이 마주치자 불쑥 다른 충동이 든다. 아니 의심이 든다. 의주는 자신이 단념하기 전에 곧장 충동을 실행에 옮겼다.


“......눈이 아주 예뻐요.”


자신조차도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아, 이제쯤 기억하는 이가 거의 남지 않은 먼 별의 언어. 작고 따뜻하던 고향의 언어다. 이 우주에 이것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변의주가 유일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스위치 탭이 장착된 오른팔의 장갑부터 시작해서, 양손을 바깥으로 꺼냈다. 그의 돌발 행위를 흥미롭다는 눈치로 지켜보던 남자는 이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얌전히 굴고 있었고, 따라서 의주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몸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침착하게 질문했다.


“아까부터 이 언어에 반응했죠. 이건 나의 모국어예요. 당신은 이 언어를 알고 있나요?”


그러자, 남자의 입술이 짧고 빠르게 움직였다. 코를 두드리는 대신 그가 직접 대답을 한 것이다. 순간 온몸에 식은땀이 밴 의주는 얼마간 손을 떨다가, 결심한 듯, 남자의 목소리를 가로막는 헬멧에도 손을 댔다. 숨이 아주 벅차고 빠르게 뒤섞이고 있었다. 두려움은 언제나 일정량의 흥분을 동반한다. 그는 뇌가 적응할 만큼의 속도로 헬멧을 탈의했고, 차고 시원한 공기가 목에 닿는 것을 느꼈다. 이어 기분 좋은 질감의 산소가 얼굴을 에워싼다. 헬멧에서 벗어날 동안 참고 있던 숨을 아주 조금씩 뱉기 시작해 보아도, 그건 가슴을 압박한다거나, 기도를 말린다거나, 독성이 느껴지는 공기 따위가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산소였음이 분명하게 실감 되었다. 허, 의주가 안도를 동반한 허탈한 한숨을 쉬자, 비로소 하하하, 남자의 웃음소리가 귓속으로 쏟아진다. 세상에. 그것이야말로 가장 평범한 사람의 소리였다.


“이제 됐어? 답답했지? 그런 바보 같은 건 왜 늘 입고 있는 거야?”


그래서 의주는 그가 자신의 언어로 질문하는 순간에도 오히려 놀라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놀랄 이유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남자가 나의 말을 이해하리라고, 혹은 반대로, 나만이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이번엔 남자의 손이 의주의 머리칼에 닿는다. 의주는 즉시 그가 만지기 편하도록 자세를 조금 낮추었다. 너한텐 안 어울려. 이어지는 말이 태평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으므로, 자신이 진정할 때까지 잠시 인내하던 의주는 남자의 스킨십이 끝나고서야 이곳에 오기까지 내내 생각했던 질문을 꺼낼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남자는 눈썹을 반짝 올리면서, 마치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상냥한 표정을 보였다.


“당신, 나를 보았죠? 새날의 아침에.”

“응.”

“......그때.”

“......”

“저한테 보여줬던 행동은 무슨 뜻이에요?”

“무슨 말이야?”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렇게 했잖아요. 팔로 몸을 안으면서...”

“아!”


포옹하던 자세 말이다. 아니, 마치 나를 포옹하려는 듯하던 자세. 한참을 끌어안다가, 이내 애틋해졌던 표정도. 내내 떠올랐고 계속 궁금했다. 실컷 머리칼을 만져댔던 손이 허공에서 잠시 망설이더니, 별안간, 의주의 코끝을 톡톡 두드리고 멀어졌다. 무엇이든 너무 갑작스럽기만 해서, 조금 벙쪄버린 의주의 얼굴이 재미있다는 듯 자꾸 웃던 남자가 내처 혼을 내는 투로 말했다.


“바보 아냐? 그거 우리 인사잖아.”

“우리요?”

“응. 우리. 나랑 너. 우리 인사.”

“...당신도 지구에서 왔나요?”

“아니. 나는 이곳에 있었어.”


톡톡, 두 번. 그건 모든 미지의 존재와 소통하기 위한 첫 번째 규칙으로, 먼 옛날, 의주에게 우주 언어를 학습시킨 누군가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손이 두껍고 차갑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어디엔들 아주 조심히 다가가야 한다고, 내가 이렇게 너를 두드리면, 그게 널 안심하게 만든다면, 어떤 언어로든 내게 대답해 주면 된다고. 변의주의 대부분을 만들어 놓고 사라진 사람으로 기억했다. 뚜렷하진 않지만 이름만은 알았다.


“이곳에서 널 기다렸어. 이번엔 되게 오래 걸렸어. 너무너무 보고 싶었는데. 정말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어. 왜 그렇게 늦었어?”

“......”

“걱정하지 마. 네가 기억 못 한다는 거 알아. 그래도 괜찮아... 넌 항상 마지막엔 기억해 냈으니까.”

“당신이 누군데요?”

“항상 그 질문부터야. 말해주기 싫어. 네가 직접 기억해 내. 내가 누군지.”


니콜라스.

변의주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Mercury ; 그것과 소통에 성공한 유일한 인물은 지구 출신의 우주언어학자이다. 그는 '그것'이 마치 성인, 그리고 남성의 성질을 가졌다고 설명하며, 그것을 '그것'으로 칭하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인간과 대단히 친밀하고, 언어 및 비언어적 표현을 나누는 데에 어려움이 없으며, 특이할 만큼 자주 미소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의 표피, 체액, DB를 추출하여 그것이 어떻게 미지의 행성에서 살아남은 것인지, 태양계가 혼란하던 시기와 얼마만큼의 이상시공을 가지는지 면밀히 조사해야 할 것이다. 이에 그것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강제할 방도를 마련할 예정으로, 자세한 계획으로는 EO 프로젝트가 참고될 예정이다. 05/10/3091]


[Ground ; 미승인. 05/10/3091]



[Mercury ; 그러나 그것과 교류 가능한 유일한 이를 포함한 다수의 대원이 이에 반대하므로, 계획은 잠정 연기되어...... 06/10/3091]



하루 두 번 변의주와 남자는 좁고 밍밍한 방에서 대화를 나눈다. 때때로 남자는 밖에 나가고 싶다든가, 우주선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들어줄 순 없는 요구였다. 그들이 나누는 언어는 우주선의 누구도 모르는 것으로, 여차하면 그의 말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노릇이었는데, 남자는 의주를 무서워하는 법도 없었다. 자꾸 그러면 당신이 우리의 정박을 원치 않는다고 할 거예요. 소심한 반항을 호방한 웃음으로 지워버리더니, 그래봤자 외로워지는 건 너라고, 의주 너는 곧 내가 없인 하루가 너무 느리게 흘러 버릴 거라고 경고했다.

남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변의주를 처음부터 친밀히 대한 것엔 우리 사이의 오래된 교류 때문이라고 했다. 의주가 자신의 동료들과, 또 가끔은 홀로 이 행성에 찾아와 남자와 사랑하고 결국은 떠나버렸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증거랍시고 따라왔지만. 순환 우주인지, 평행 우주인지, 너무 낡고 오래되어 이제는 인간사에 큰 화제도 되지 못하는 법칙에 관한 소리라면 변의주도 익숙했다. 그 딜레마에 빠져 사는 대원은 우주선에도 있었다. 허나 의주는 한평생 연구한 우주란 그런 시시한 드라마 따위가 일어날 수 없는 곳이란 사실쯤을 진작 깨달은 인물이었으며, 무엇보다. 차라리 그런 건 너무 흔하고, 간단한 일이어서, 우리가 목도한 우주를 반추하면, 굳이 발생할 필요가 없는 사건이라고도 여겼다. 네가 날 사랑해서 태어난 우주가 수백, 수천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를 바라보다 허탈하게 웃자, 그가 조금은 쓸쓸한 표정이 되었던 것만은 신경이 쓰였으나...


“우주선이 오는 게 보였다고요?”

“그래. 이번엔 서쪽이었어. 늘 동쪽에서 나타났는데 말이야. 이것도 점점 변하는 걸까 싶어. 예측이 갈수록 어려워지거든.”

“...있잖아요. 다 믿진 않지만, 그래요. 당신이 말하는 나는 아마 다른 우주의 나겠죠. 우리도 그 가설에 대해 알고 있어요. 하지만 가능하다고 해도, 결국 그게 전부 나는 아니에요. 분명 각기 다를 거라고요. 아무리 우주라고 해도 시간이 그만큼 교차할 순 없어요.”

“하지만 신기하잖아. 그럼 어떻게 그 모든 네가 항상 똑같은 결말인데?”

“또 그 소리죠. 당신을 사랑한다는...”

“정말이라니까! 어차피 이 반응도 익숙해. 나중엔 아니라고 화도 낸다? 귀가 새빨개져서. 도대체 왜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은 건지.”


그러는 남자는 어떻게 이렇게 부끄러움도 모를까 싶다.


터무니없더라도 의주에겐 쑥스러울 이야기임은 확실했다. 먼저 시선을 피해버린 그가 허둥지둥 무언가를 적기 시작하자, Ground ; 이상징후 없음, 호의적임, 추정 불가한 DB를 사용함, ‘미소’ ‘눈물’ ‘수면’ 행위의 의미를 앎. 남자는 의주의 곁에 가까이 앉아서 한참을 미적대더니, 그것을 술술 읽어내렸다. 의주, 내 눈물을 본 적 있어? 그라운드어를 사용하는 그를 보고 비명을 지른 의주가 공책을 가슴으로 안으며 멀찍이 도망치자, 약간의 배신감이 섞인 귀여운 얼굴을 보고 그가 또 하하, 웃었다.


웃기는.


의주는 그를 만날 때 더 이상 수트나 헬멧을 착용하지 않는다. 아주 평범한 옷을 입고, 대신 머리를 단정히 빗고 나타났다. 왜냐하면 이 지루한 관찰과 기록 따위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남자가 의주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볼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는 인간 사이에서 아주 대견한 마음이 든다거나, 혹은 ‘당신에게 접촉하고 싶지만 구실이 없을 때 괜히 하는 행위’라고 의주가 설명했고, 남자는 “너도 그런 것을 할 줄 아냐.”는 말로 단번에 의주를 침묵시켰다. 의주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면 남자는 무척 만족한 표정이 되었다. 넷째 날 즈음에는 이러한 말도 들려주었다.


“넌 내가 이렇게 해야 잠을 잘 잤어. 이것도 못 믿어?”

“믿어요. 하지만... 제가 아니래도요.”

“네 우주선이 반대로 날아오는 변화보다, 네 그 한결같은 대답들이 나는 항상 무서워. 그건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안 되거든.”

“......”

“너는 언젠가 아주 나이든 노인이 되어 나를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했지. 혹은 아기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고... 그런데 나는 말이야. 전부 상관없으니까 그냥 나를 기억하는 네가 와 주길 바란다고 했어. 내가 기다린다는 사실을 아는 네가 돌아오길 바란다고... 이번에도 정말 아닌 걸까? 왜 아닐까? 왜 우주는 이렇게 많을까?”


눈물을 본 건 그때였다. 기록이 늦었을 뿐.


“그래도 난 너 안 미워. 나는 그냥 매번 널 사랑해. 그러니까 말이야... 내일 또 보자. 꼭 보자.”


우주에 아주아주 오래 살면. 정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래도록 우주를 떠돌면, 남자의 말을 이해하게 될까?


[Ground ; 남자는 종종 인간의 지난 역사를 파악하고 있는 듯 보인다. 가령 지구로부터 우주 이주를 택한 인간의 현재라든가, 실패한 비너스 프로젝트에 대해 말이다. 더불어 남자는 웃고 울고 화를 내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특이점이라면 자신을 무엇으로 정의하기를 거칠게 거부하며, 행성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마치 행성과 남자가 동일한 존재라는 것처럼. 남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접촉한 인간은 지구 출신으로, 그에게서 언어를 배웠고, 오래도록 사랑했으나, 결국 그를 떠났다. 이것을 단순한 동료나 사건으로만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당시의 기억을 꺼낼 때에만 남자의 비언어적 소통에 큰 변화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접촉 초기 리포트의 수정을 권고한다. 남자에겐 동료가 없다. 대신 기억이 있을 뿐이다. 그 기억을 파헤치길 원한다면, 정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남자는 말의 의미를 알며, 의미에 상처를 받는다. 07/10/3091]


복도 중앙, 중력권 안에 그의 방이 있다. 의주는 하루에도 수십 번 그곳을 지나친다. 드나드는 것보다 신경 쓰이는 것이 지나치는 일이다. 답답한 수트에 갇힌 신세를 탓하려는 순간마다 얌전히 그곳에 갇혀 준 남자를 떠올렸고, 그러면 필히 마음이 무거워서 좀체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문에 자리한 얼굴 크기의 동그란 창에 빼꼼히 눈을 올리면, 가끔은 남자가 인사하고 있었고, 자주는 그의 등만을 보게 됐다. 남자는 문을 창을 등지고 앉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고개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기울이다 이내 푹 숙였다. 슬픈가? 아픈가? 의주의 손이 문을 두드리려다 애매하게 멈춘다. 24시간 365일 재생되는 공유 리포트를 딱딱한 기계음이 이렇게 읽어 주었다.


[Ground ; 그것이 몸을 활용해 처음으로 인간에게 요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와 대화하고 싶다.' 여기서 그는 그것과 소통하는 언어학자로, 그것이 특정 인간에게 애착을 보이는 것은 다소 위험한 신호로 여겨지며 이 이상의 행위를 보일 경우, 대책을......]


우주에 예외란 없다.


온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기에 모든 것이 두렵고, 또한 그렇기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곳이다. 의주는 지구를 떠나오는 길에 이를 수천, 수만 번 학습했다. 예외란 없다. 예외란 없는 것이다. 그가 나에게 애착을 보이는 건 예외 없이 위험한 신호임을 안다. 안다. 알지만...


갈비뼈 아래쪽 포켓을 뒤지자 역시 종이가 있었다. 반가운 얼굴로 그것을 꺼낸 의주가 종이를 벽에 대고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지구 언어로 글자를 쓰는 건 무척 간만의 일이었으므로 어색함에 글씨가 아주 못나졌다. 귀가 새빨개질 정도의 창피함이 일었지만 아무렴 아무도 모를 테다. 어깨를 무겁게 누르는 수준의 보호 헬멧은 가끔 감정을 숨기는 데에 도움이 된다.


[Ground ; 그것은 더이상 특정 대원에 대해 묻지 않는다.]


[Ground ; 다만 그것의 방에서 예외의 물건이 발견되었다. 재질은 평범한 종이, 사용된 것은 단순한 잉크이나 해독 불가한 언어가 적힌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언어학자를 호출하였으며 그가 해석하기로 내용은 쓸모없는 일과에 불과하다고 한다. 가령 몇 시 몇 분에 식사를 했으며, 몇 명의 인간을 마주쳤고, 몇 시 몇 분에 잠들고 깬다는 식이다. 우리는 이를 신뢰하여 자세한 내용은 기록하지 않겠다. 09/10/3091]


얼마 후 쪽지를 가져간 이들이 남자에게 그것을 돌려주었을 때, 남자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기쁨을 느꼈다. 정말이지 날아갈 것처럼 좋았다. 쪽지가 손에 돌아왔다는 건 의주가 우리만이 나눌 수 있는 언어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잘 숨겼다는 뜻이고, 고로 여기 적힌 모든 말은 앞으로도 영원히 나와 변의주만이 안다는 뜻이므로 그러했다. 모두가 사라진 방에서 남자는 아주 작게, 쪽지를 소리 내어 읽는다. 다 읽은 후에는 처음부터 다시. 또다시. 또다시 읽었다.


“9:30, 11:05, 13:45, 15:30, 17:20, 그리고 잠들기 전에 나는 이곳을 지나요. 혹시 심심하면 돌아봐요. 대신 조용히요. 나도 조용히 인사할게요.” 


남자가 더는 문을 등진 채 앉지 않는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정도면 좋겠어요. 이곳은 카메라가 많거든요.”


대신 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고, 초를 센다. 볼록 튀어나온 유리창은 나를 만나지 않는 모든 순간의 변의주를 가둔 헬멧을 닮았다. 거기, 쪽지에 적힌 시간과 조금의 오차도 없이 나타나는 동그란 눈동자는 매번 똑같은 속도로 눈꺼풀에 가려졌다, 다시 나를 마주한다. 남자는 환히 웃으며, 똑같이 눈을 감았다 뜨면서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러자 부리나케 도망가 버리는 변의주를 만나는 5초. 이 5초만큼은 여태껏 어느 우주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다. 유일한 오차다. 믿을 수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는 그저 이 순간을 온전히 누리고 있다.


[Jupiter ; 행성은 회색. 정말이지 암흑과 회색뿐이다. 인간에게 해롭지 않은 대기가 형성되었음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삭막한 땅이지만 어쩐지 두렵지 않다. 마치...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환영하는 땅과 바람 때문일까? 이곳만큼은 우리를 해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인지 희망을 가져보고 싶다. 우리는 너무 오래 또 멀리 헤매어 왔다. 10/10/3091]


의주와 대원들은 평소처럼 새로운 행성이 인간이 살기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는지 분석하기 바쁜 날을 보낸다. 어떤 날엔 나무뿌리와 흡사한 흔적을 발견하고 어떤 날엔 물이 있었으리라 추정되는 깊고 짙은 크레이터도 찾아냈다. 하지만 어디에도 남자가 홀로, 모든 대기질의 변화와 극심한 상하강의 기온 차를 버텨낼 수 있었을 근거를 발견할 순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모두가 입을 모아 남자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떤 대원은 우리가 오랜 우주 비행으로 미쳐버린 게 분명하다고, 그는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우리 중 하나였거나, 우리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거나, 그뿐이라고 계속해서 주장했다. 의주는 그가 두서없이 토하는 비너스어를 수집하여 차분히 진실을 돌려주는 역할이었다. 


토니, 우리는 미치지 않았어. 우리 모두의 DB가 여기 기록되고 있단 걸 알잖아. 너는 비너스에서 출발한 훌륭한 우주비행사고, 나는 지구에서 온 우주언어학자이지. 우리의 목표는 동일해. 새로운 땅을 찾아야지. 그곳에선 우리 모두 편안하게 숨을 쉬고, 적당한 무게로 발을 디디고,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아주 오래 잠을 잘 수 있을 거야......


[Jupiter ;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필요한 건 휴식이다. 우리에겐 휴식이 필요하다.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며 모든 연구를 멈추고, 다만 그것으로부터 다음 행성지에 관한 정보를 취하기로 한다. 휴식기 동안 그것과 접촉하는 이를 제한한다. 13/10/3091]


모두의 깊은 피로를 깨달은 선장이 결단한 짧은 휴식기만으로 모처럼 대원들 사이에 화색이 돌았다. 대부분은 어떤 질병에도 걸리지 않은 변의주를 위안 삼아 하나둘 헬멧을 벗고 행성의 맨 공기를 취하러 나서기도 했다. 누군가는 맨발로 땅을 밟아 보았으며, 그것의 감촉은 아주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닮았다고 소리치는 일도 있었다. 모래사장... 의주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까마득한 시절에나 그런 곳을 밟아 보았다. 온몸으로 느끼고 기억했다. 언어가 아니라 몸으로. 피부로 시간을 느낀 건 그때에나 존재했던 일이다.

 

[Jupiter ; 승인. 13/10/3091]


그리고 이 소식은 남자에게도 닿은 모양이었다. 그는 인사를 전하러 온 의주를 대뜸 붙잡고선 무엇이든 대답해 줄 테니 “가장 궁금한 걸 말해 보라.”고 했다. 나는 휴가 동안 아주 많은 잠을 자려고 했을 뿐인데. 당분간 얼굴을 볼 수 없을 거라 말했을 뿐인데. 깜빡 고장난 의주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생각도 못 하곤 머리를 굴린다. 남자가 너무 가까이 있었다. 너무 가까이...


“제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 그다음은 뭐였는데요?”


의주와 그는 따뜻한 조명이 켜진 의주의 방에서 지루한 사전들을 뒤적인다. 남자의 요구에 의주가 내어놓은 대답이 “당신이 몇 개의 언어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해요.”였기 때문이다. 방을 보여 주겠다는 제안은 흥미로웠지만, 도통 재미란 없는 애다. 넌 정말 한결같아. 남자는 혀를 내두르면서도 순순히 여섯 개의 손가락을 펼쳤다.


“네가 하는 모든 언어. 너는 나에게서 이 모든 걸 배웠거든.” 그건 의주를 제외한 누구도 모르는 니콜라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단지 그 대답만으로, 의주는 그가 주장하는 숱한 우주들을 전보다 더 믿을 수 있게 되었으며, 두 번째 질문까지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너는 나에게 언어를 배워. 처음엔 머큐리, 두 번째가 비너스였어. 왜냐하면 나는 너의 언어에 아주 미숙했고, 너는 나와 더 많이 얘기하고 싶어 했거든.”


허락도 없이 침대에 누운 남자의 목소리가 얼굴을 덮은 사전 안에서 웅웅- 울린다. 마치 행성의 자전음 같았다.


“제가 곧잘 배우던가요?”

“하하. 아니. 그렇지만 아주 열심히 했지. 넌 좀 끈기가 있거든. 고집도 얼마나 센지. 하나를 배우면 그다음엔 꼭 그 언어만을 사용해서 내게 말했어.”

“...그리고요?”

“음. 약간 시시한 수작도 많이 부렸는데. 그라운드어를 배울 땐 말이야. 나한테 ‘사랑해’라는 말을 어떻게 발음하냐고 물었지. 가르쳐 주자마자 나에게 ‘사랑해’하고 말했고.”

“......”

“부끄러워?”

“제 얘기가 아니라고 느껴져서, 그렇게까진 아니요.”

“거짓말.”


그래 거짓말이다. 남자가 들려주는 모든 순간의 자신이 부끄럽고 믿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변의주는 정말이지 그런 짓을 태어나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한참을 침묵하는 의주를 기꺼이 기다리던 남자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 의주는 조심스레 남자의 얼굴을 덮은 사전을 치웠다. 촘촘히 펼쳐진 속눈썹이 보인다. 잠든 얼굴은 제법 아이 같은 면이 있다. 아니. 실제로 남자는 고작해야 의주 정도의 나이로 보일 만큼 아직 어린 구석이 대부분이었다. 행성과 같은 나이테라니. 믿을 수 없어서 그의 DB를 온종일 해독했던 의주는 자신이 읽은 부분이 고작 1/80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침내 받아들였고, 그러자 어느 순간엔 토니를 이해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 나는 미쳤을지도 몰라.

하지만 미쳐버렸다는 사실을 영원히 모른다면, 이 수상한 존재와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으리라.


[Earth ; 남자가 우리와 다른가? 우리가 남자와 다른 것은 아닌가? 15/10/3091]


[Ground ; 그는 매우 협조적이며 이보다 더 인간과 밀접할 수 없다. 더불어 그가 행성의 원주민이라면, 우리는 이곳을 침입한 범죄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를 환영했다. 어떤 증명이 더 필요한가? 우리는 어째서 남자를 경계하는가? 남자가 해석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해서? 특정 인물과의 교류에 집착해서? 아니. 우리는 처음부터 인간 외의 생명체와 교류할 의지가 없던 것이다. 비너스 프로젝트와 EO 역시 그렇게 실패했다. 훗날 우리의 리포트가 세상에 공개된다면 모두가 경악할 것이다. 이토록 상냥한 생명체를 '그것'으로 표하는 인간의 매정함 때문에. 15/10/3091]


[Ground ; delete. 15/10/3091]


그래, 함께할 수 있을 테다.


우습고 간단한 결론이지만. 그리고 남자에겐 절대 들키지 않을 것이지만. 사실 의주는 이미, 남자가 말한 끝에 다다르지 않아도 충분히 실감하고 있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남자에게 반했고, 당신이 알려주는 모든 변의주가 정말 진실이라면, 그렇다면 지금 내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한다고. 멀리서 당신이 우주를 끌어안으며 내게 인사한 순간부터 알았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처럼 믿을 수 없이 빠르게 사랑에 빠졌다. 그래도 숨길 것이다. 숨길 것이다. 숨길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당신을 떠나야 할 테니까...


“안 자는 거 다 알아요.”

“......”

“책을 치우자마자 깼잖아요. 얼른 일어나요.”

“넌 정말 낭만이 없어.”

“하하. 미안해요. 이 우주의 나는 좀 그런 사람인가 봐요.”


머쓱한 눈치로 몸을 일으킨 남자와 두어 시간을 더 보내자, 하루가 금방 지났다. 의주는 실험실로 돌아가기 싫다는 남자를 겨우겨우 설득해서 돌려보내고서야 한시름을 놓았다. 세상에. 얼마나 거리낌이 없고, 위험을 모르는지. 남자는 변의주의 방에서 눕고, 앉고, 서성이고, 의주를 뒤집었다가 휘둘렀다가 놀래켰다가 웃겼다가 조금 화나게 했다가도 금방 즐겁게 만들었다. 다리를 베고 눕고 대뜸 업히는 건 차라리 간단한 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무거워요. 괜한 변명으로 멀찍이 도망치는 의주를 흘겨보면서, “언젠가 나를 업지 못하는 게 무지 슬픈 일이 될 텐데.”하고 말해 정말로 지레 겁을 먹게 한 일은 덤이다.


[Ground ; 행성에는 생명이 부재한다. 그것은 존재하나 존재 이상의 증명이 불가하므로 행성 자체의 필요성을 대변할 수는 없다. 여태의 관찰로 보았을 때, 이 행성은 이미 오래전 수명을 다했다. 다만 운이 좋게 살아남은 먼지덩어리라고 보아야 할 테다. 바스라지거나 한데 흡수되거나, 자립할 힘을 잃고 떠돌아다녀야 하는 별이 여태 살아남은 이유는 더 오랜 관찰이 필요한 사항이겠으나 우리에겐 남은 엔진이 부족하다.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휴식기가 종료되는 대로 엔진을 고칠 것을 제안한다. 17/10/3091]


[Ground ; 승인. 우리는 곧 엔진을 고친다. 17/10/3091]


사전을 덮고 누운 의주가 휴식기가 끝나는 대로 엔진을 고치자는 리포트를 곱씹는다. 이번 결정은 몹시 빨랐다. 아무래도 남자 때문일 테다.

엔진을 고치자는 선언은 이별을 두려워한 인간이 만든 우주비행사만의 은어로, 말하자면 ‘행성을 떠나자’는 뜻이었다. 이 행성은 우리가 살 만한 곳이 아니므로, 우리는 또 멀리멀리, 기약 없는 여정을 떠나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건 실패가 아니라 수정일 뿐이니 다만 엔진을 고쳐 다시 나아가자고. 처음엔 그만한 멋진 말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단 한 번의 정착도 성공하지 못 한 채 우주를 떠돈 수없는 시간을 되뇌면 이젠 그만한 무서운 말이 또 없었다. 엔진을 고쳐야지. 우리는 계속 엔진을 고쳐야만 살 수 있다.

[Ground ; 승인. 18/10/3091]


하지만 가끔은 엔진을 고치지 않아도 살 수 있고 싶다.


[Ground ; 승인. 18/10/3091]

[Mars ; 승인. 18/10/3091]

[Venus ; 승인. 18/10/3091]

[Ground ; 승인. 18/10/3091]


낯설더라도, 두렵더라도, 막막하더라도 함께할 방법을 찾고 싶다.


[Ground ; 그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18/10/3091]


후대의 누군가, 혹은 우리를 기다리는 누군가, 예를 들면 가족, 연인, 먼 고향들, 그들에게 우리의 여정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리포트는 이제 비행선 하나로도 감당이 불가할 만큼 쌓여, 현재는 안드로메다은하 가장 가까이에 자리한 우주정거장을 창고로 사용하는 수준이었다. 우주복에 부착된 통신 시스템으로 얼마든지 소리를 나눌 수 있음에도 기록에 집착하는 행위 역시 망망의 우주가 만든 외로움의 흔적이고 존재의 증명을 향한 인간의 본능이겠으나, 의주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 모두를 우리 외의 누군가 읽는 날이 정말 올까?


하염없는 우주를 가로지르다 보면 엊그제 스물이었던 C가 오늘 마흔이 되고, 또 다른 아침에는 열다섯이 되기도 한다. 겉은 그대로인데 마음이 낡은 탓으로 우주선에서의 삶을 두려워하고, 이제라도 자신의 별로 돌아가길 원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좀체 우주선을 내릴 곳을 찾지 못하는 시기면 의주는 개개인의 언어에 맞춰 마음을 통역하고, 리포트를 도우며, 이것이 그들이 출발했던 별에 닿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약속을 얼마든지 해 주었다. 그리고 그건 의주도 마찬가지다. 의주는 하물며 이 우주선에 오른 이들조차 읽을 줄 모르는 기록을 시작할 때면 끔찍하게 외로워졌고, 사랑하는 우주가 두려워졌으며, 나아가고 나아갈수록 깜깜히 잊히는 날들이 그리워졌다. 정말이지 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비행을 시작했는지까지.


[Earth ; error. 19/10/3091]


[Ground ; 미승인. 리포트 Earth 체크 요망. 19/10/3091]


한땐 정말 우리의 비행을 사랑했으리라.


[Earth ; 남자는 나의 말을 이해하고, 가끔은 나를 위로한다. 다중언어를 사용하는 삶의 혼란을 이해한다. 정박하지 못하는 인간을 위로한다. 내게 안식처럼 느껴지는 대화를 시도하며 내가 원하지 않으면 기꺼이 침묵하는 배려심을 지녔다. 우리는 그에게서 이제 더 '추출할' 필요가 없다. 그는 보여달라고 말하는 무엇이든 기꺼이 보여 줄 준비가 되어있다. 준비되지 않은 것은 인간이다. 남자처럼 완벽히, 이 우주에 부합하는 존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인간. 남자에게 행성을 사랑하는 이유를 물었다. 남자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렇게 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19/10/3091]


[Ground ; Delete. 19/10/3091]


사랑...


[Ground ; 코드 EJ. 주시 요망. 금일 부로 ‘그것’과 대원 내 긴밀한 접촉을 금한다. 20/10/3091]


의주가 떠나온 별에서 사랑은 사랑.

그리고 먼 옛날 니콜라스에게 배운 다섯 개 우주언어에서 사랑은 어느 땐 안녕처럼 들리고, 때로는 우리처럼 들리는 희한한 감정어였다. 우주에는 관측 렌즈에 몸의 1/350 파트만이 담기는 크기의 존재도 있었고 너무도 미세해 마치 공기 중의 입자를 다루는 것 같던 존재도 있었다. 모두가 언어를 사용한다면 좋았겠지만, 접촉이 통신 방법인 쪽도, 행성에 빼곡하게 데이터를 기록하는 쪽도 존재했으므로 사실상 변의주가 나서 소통하는 일은 드문 기회라고 봐야 했다. 그럼에도 종종 사랑만은. 우주 언어 순서대로 사랑을 발음하면, 자신의 언어가 들릴 때에 어떤 존재도 그를 박해하는 법이 없었다. 사랑이란 참 그래. 도무지 외면할 수 없는 표현인 법이다.


평생 말하진 못할 테지만, 본래 남자에게 테스트를 시작하던 날도 사랑은 정해진 순서였다. 다만 이를 발음하기도 전에 변의주가 더럭 긴장해 버렸고, 어쩐지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던 탓에 불필요하게 말이 길어지는 순간. 다행히 더 늦기 전에 남자가 친절한 태도로 지구의 언어를 유창히 구사해 준 사건은 앞으로 또 겪을 일 없는 거짓말 같은 일이리라. 지금도 의주는 남자의 방을 나서는 순간이면 몇 번이고 망설이곤 했다. 사랑한다고 해 볼까. 해 볼걸. 그때 내가 만약 눈이 예쁘다는 식상한 말로 둘러대지 않고, 사랑한다고 했다면, 그럼 남자는 처음부터 모든 걸 알려주고, 종종 슬픈 표정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만 같아서.


[Ground ; 승인. 20/10/3091]


[Ground ; 그것은 함께할 수 없다. 20/10/3091]


[Ground ; re. 15/10/3091 아마 인간은 영원히, 우주 생명체와 삶을 나누는 것이 불가할 테다. 인간은 인간됨과 그렇지 않음의 거리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인간의 형태를 한 인간 외의 것에는 더욱이 감정 유지가 어려우며, 이는 너무 오랜 세월 우주를 떠돌아다닌 우리의 숙명이자 저주다. 우리가 각자의 별을 떠나온 순간부터 시작된 저주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냉정히 판단했을 때, 우리는 ‘그것’과 접촉하지 말아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승인 여부와 관계 없이 시일 내 엔진을 고칠 것이다. 21/10/3091]


끝없는 비행 속에서, 우주복을 벗어 던진 우주비행사들이 느낄 자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행성을 뛰어다니고, 손에 쥔 모래의 반짝거림을 토론했다. 푸른 빛의 일출과 완전히 깜깜하지 않은 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루를 꼬박 아주 먼 거리까지 나아갔던 P는 이곳엔 아무것도 없다고, 망망대지 뿐이라는 사실을 보고하며, 그러니 남자가 이곳에서 살아남은 건 인간의 역치로는 잴 수 없이 발달한 존재라서거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가 모두 미친 것이라고. 계속해서 소리쳤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를 발견하지 않은 우리가 미치지 않았을 확률도 없는데도.


[Ground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한다. 이곳은 아름다운 행성이다. 정말이지 아름답고 평화롭다. 공허만이 가득함에도 아름다울 수가 있다. 서쪽에서 뜨는 화성. 아침 해가 푸른 빛을 띄우는 이곳은 마치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 21/10/3091]


그러는 사이 의주의 계획은 점차 분명해졌다. 확신하건대 남자는 의주보다 뛰어난 언어능력을 갖추었다. 그를 이루는 DB만 하더라도 그토록 복잡한 줄기와 뿌리가 단 하나의 오차 없이 모두 연결되어 있었고, 하나하나에 우주선의 시간으론 기록할 수 없는 양의 시공 기록이 새겨져 있다. 어느 순간은 몇 광년 전이고 어느 순간은 몇 광년 후를 가리켰다. 이만큼 복잡하고 무서운, 아름답고 친절한 미지의 존재는 처음이었으므로, 우리는 그를 놓쳐선 안 된다고 주장할 작정이다. 그러니까 말이야. 어쩌면 엔진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고, 계속 이 모래를 밟고 공기를 마시며 자유로워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남자가 있는 행성에서. 이곳에서. 더는 다른 희망을 찾지 말고.


[Earth ; error. 23/10/3091]

[Earth ; 리포트 체크 요망 V-G 23/10/3091]


[Venus ; 우리는 함께할 수 있다. 23/10/3091]

[Jupiter ; 우리는 함께할 수 있다. 23/10/3091]

[Mars ; 우리는 함께할 수 있다. 23/10/3091]

[Mercury ; 우리는 함께할 수 있다. 23/10/3091]


이튿날 식당에서 마주친 R은 평소보다 밝은 얼굴이었다. 헬멧을 벗은 얼굴은 의주에게도 실로 오랜만이었으니 반갑기까지 했다. 푹 쉬었나 봐요? 의주의 인사에 아주 특별한 날에만 복용하는 탄산음료를 꺼내던 그가 호응했다. “다음 목적지를 찾았거든. 긴 여정이 될 거야. 미치지 않으려면 행복해야지.” 그러자 의주의 손에서 반듯한 서류 뭉치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너울너울, 깃털처럼 흩날린다. 내내 준비한 모든 계획이 거기 있었다.


의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Ground ; 우리는 함께해야 한다. 24/10/3091]


“다음 목적지?”

“네. 인간은... 여태 정박할 수 있는 별만을 찾고 있거든요.”


그 길로 곧장 남자를 찾아가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곧 떠날 거예요. 그는 긴장하고, 불안해 보이는 의주의 모습에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훗날에서야 그것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나의 결정만을 기다린 사람의 눈빛임을 알게 되었지만, 당장은. 의주는 더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반드시 하고 싶은 말만이 있다. 네 동료들이 와서 나의 머리를 파헤치고, 마음을 추출하려 했다고, 하지만 내 몸의 언어는 고작 인간의 기술로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어째서 매번 같은 실수를 하냐는 남자의 토로에 끔찍하게 창피한 마음이 들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아무리 엔진을 고치고 또 고쳐도 고작 제자리에서 비행할 뿐인 것이다. 영원히 정착하지 못하고 발전하지 않는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위해 비행을 할까. 지구를 버린 이유는 뭐였지? 이젠 너무 까마득해서, 좀체 떠오르지 않는 바보 같은 선택의 연속이 지겹다. 더는 그러고 싶지 않다. 더는 외롭거나. 외로워서 미치거나. 중요한 것들을 까맣게 잊고 나아가기만 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와 이런 식으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두 손을 얌전히 모은 채 고개를 푹 떨어트린,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앉아있는 의주를 가만, 바라보던 남자가, 불시에 의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시에 긴장한 몸은 움찔거리며 놀라고도 그 손을 피하진 않았고, 한참 뒤통수를 문지르던 손바닥이 자연스레 목을 감쌌을 땐 마른침이 넘어가기까지 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떠난다고 인사하려고 왔어? 말없이 떠나면, 내가 슬퍼할까 봐?”

“...네.”

“어째서?”

 

[Earth ; 우리는 그와 함께일 수 있다. 24/10/3091]


“여기서 만난 유일한 행성인이니까요.”

“그게 다야?”

“......”

“거짓말쟁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서.”


[Earth ; 그렇지 않다면, 나는 엔진을 고치고 싶지 않다. 24/10/3091]


“...같이 갈래요?”


의주의 목소리는 형편없었다. 떨림이 목소리보다 큰 쪽이었다. 그런데도 그 눈이. 남자를 쫓으며, 이토록 가까이서 마주해도 피하지 않는 눈만은 떨지도 않고 아주 분명했다. 같이 가요. 다시 한번 발설한 말에는 이제 권유가 아니라 부탁이 섞여 있었고, 그러자 남자의 엄지손가락이 무척 부드러운 속도로 의주의 목을, 뒤이어 귓불을 살살 쓰다듬는다. 같이 있고 싶어요. 또한 그보다 더 부드러운 모양으로 남자가 미소 지었다. 아마 수트를 입고 있었더라면, 생체신호에 경고음이 떴을지도 모를 만큼 의주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긴장했다.


드디어 말해주는구나. 남자가 속삭였다.


“그럴 수 없어.”

“어째서요?”


단호한 음성이었지만, 어쩐지 슬퍼 보였다. 아니. 기뻐 보였나? 나의 마음을 알아차려서? 사실 처음부터 남자도 알고 있었을 테다. 모르는 척 기다려 주었겠지. 이 행성만큼 나이를 먹은 존재가 겨우 인간의 비루한 마음 하나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을 텐데도. 내가 말할 때까지.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그래서 웃을 수 있는 걸까? 처음으로 엔진을 고치고 싶지 않다고 여긴 우주비행사의 마음에 문득 설움까지 끼어들려는 찰나였다. 남자가 의주에게 키스했다. 이마에 짧게 닿았다 멀어진 입술은 그 감촉까지도 인간과 다를 바 없어서, 벙쪄버린 의주를 보고 키득키득 웃는 얼굴을 붙잡고 저도 모르게 다시 입을 맞췄다. 혀가 닿자 의주는 마침내 다 알게 되었다. 그래, 그 모든 건 전부 나였음이 맞다. 내가 맞을 테다. 모든 우주의 나는 결국 남자를 좋아하고. 그와 입을 맞추고. 아, 정말 이렇게도 나와 똑같은데. 그저 인간 같은데. 어째서 우리는 헤어져야만 할까. 몹시 괴로웠을 것이다.


“거봐. 날 좋아하게 될 거라고 했지?”

“같이 있고 싶어요. 제발 함께 가요. 갈 수 있어요. 어딘가에 당신도 함께 머물 만한 별이 있을 거예요.”

“그럴 수 없어. 넌 항상 그렇게 말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어.”

“...할 수 있어요. 제가 설득할게요. 당신이 사실,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단 걸 보여 주기만 해도 될 거예요.”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대도.”

“어째서요?”

“......”

“당신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해서요?”

“......”


동시에 아주 달콤했겠지. 지금처럼.


“당신이 나를 기다리기로 해서요?”

“...그래. 내가 널 사랑해서. 모든 우주의 널 사랑해서. 나를 사랑하러 오는 널 그냥 둘 수 없어서. 널 기다려야 해서. 그게 내 엔진이라서. 난 여기에 남기로 결정했어. 이게 내 우주야.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똑같은 건 너뿐만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야.”

“다른 우주의 내가 당신을 저주했나 보군요.”

“그런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마.”


이제쯤 거의 울고 있는 의주의 안쓰러운 얼굴을 상냥하게 매만지면, 보채듯이 다시 한번 입술을 맞대곤 끝내 심통이라도 난 것 같은 표정이 된다. 이 모든 게 남자에겐 너무 익숙했고,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그럼 내가.”

“응.”

“내가 반드시 돌아올게요.”


순간, 남자의 숨이 멈춘다. 동시에 어느 날의 약속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한계 없이 팽창하는 우주가 태어나고, 소리 없이 사라지고, 반복되고, 겹치고, 쌓이며, 두 개의 선택지가 만드는 우주만 해도 수백 개. 수백 개의 우주가 만드는 또 다른 우주가 다시 수천 개. 수억 개. 변의주는 어느 우주에든 있고, 반드시 나를 찾아오며, 전부 나를 떠나지만, 단 하나, 그 모든 우주를 만든 태초의 변의주만이 약속했던 말은 어떤 우주에서도 반복되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을 듣기 위해 내내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여기,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의주와 눈앞의 의주가 동시에 말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올게요. 당신을 찾으러. 다른 우주가 아니라, 내가. 내가 반드시 그럴게요.”


[Earth ; 반드시 돌아올게. 다른 누가 아니라 내가 올게. 약속할게. 18/10/2090]


“......”

[Earth ; 기다려줘. 18/10/2090]


“기다려 줘요.”


그제야, 남자도 어쩌면. 끝에서야 깨닫는 건 나였구나. 너는 이미 약속을 지켰구나. 그런 생각을 했으며. 의주가 자신을 조심스레 안았을 때,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대고, 이 크고 무서운 우주선이 나의 땅에 내려와, 변의주를 내게 다시 보여 주었을 때를 마음 깊이 떠올렸다. 나는 널 기다렸다고, 네 약속대로 오직 너만을 여기서 기다렸다고 말하고자 모든 우주를 끌어안는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린 건 네가 유일했던 이유를 온몸으로 이해한다. 너구나. 정말 돌아왔구나. 이미 너였구나. 셀 수 없이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나누는 포옹은 기억하는 만큼 따뜻하고 간절한 것이었다. 의주는 몇 번이고 다시 말했다. 늦지 않을게요. 아주 빠르게, 다시 엔진을 고칠게요. 엔진을 고칠게요. 보고 싶을 테니까. 너무 보고 싶을 테니까.


“니콜라스가, 날 기다릴 테니까......”


어깨가 다 젖을 만큼 서럽게 우는 니콜라스를 따라, 결국 의주도 엉엉, 울음을 터트린다. 그는 아주 먼 옛날. 이 비행이 시작되던 순간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전의, 처음으로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가르쳐 주었던 아름다운 미소를 떠올리며, 니콜라스의 코끝을 두 번 두드렸다.


그리고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도록. 도무지 잊을 수 없을 만큼 오래도록.


“그래. 또 기다릴게. 그럴 수 있어. 그러니까...”

“네.”

“너도 두려워도 괜찮아. 이젠 나를 알잖아.”


그건 사랑한다는 말보다 훨씬 야속하고, 훨씬 어렵고, 하지만 아주 용감한 고백이다. 결국 울음 사이로 하하, 웃음을 터트린 의주가, 다시 한번 니콜라스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좋은 줄 알았다면, 창문 너머로 당신을 발견한 그 순간, 뛰쳐나가 안아보는 거였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니콜라스는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두렵지 말자. 대신 기대하자. 다시 만나면 분명 좋을 거야. 더 좋을 거야. 이번엔 나도 처음부터 말해줄게. 네가 날 사랑한다고. 그게 이 우주의 법칙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정말 보고 싶을 거야. 엄청 보고 싶을 거야. 그러니까 꼭 빨리 와야 해. 아주아주 빨리. 내가 잊히기 전에.”


 [Earth ;


“약속할게요.”


우주선이 떠오르고, 지평선엔 그늘이 진다. 반대로 창틈에는 새날이 빛이 스미고 있었다. 이곳은 태양으로부터 너무도 멀어, 아마 가장 가까이서 발광하는 이름 모를 행성이 빛의 근원지일 터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설고 아름다운 빛.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의주는 고개를 돌렸다. 둥근 창 너머로 방금 떠나온 행성의 등이 유려하게 펼쳐져 있다. 저 어딘가 그가 있겠지. 모래와 함께 폭풍과 함께 가끔의 충돌이나 따뜻한 낮잠과 함께 있을 것이다. 때로는 그 사실만으로도 많은 게 충분하리라. 어느 우주에서든 그 사실을 잊을 수 없으리라. 나는 믿는다. 최고의 속력으로 그곳에 돌아가야 하니까.


그러니 새날이 지기 전에 엔진을 고쳐야지.]